▲ 박운석
▲ 박운석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우연히’ 봄이 왔다. SNS에서 온통 벚꽃 사진들로 도배된 이후에야 ‘우연히’ 봄이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봄은 우연히 온 게 아니었다. 계절의 변화에 둔감하다는 구차한 변명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뉴스에서 ‘우연히’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들어오던 참이어서 봄도 뜻하지 않게 저절로 온 것으로 느꼈으리라.

‘우연히 신드롬’의 시작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일부 직원들의 광명·시흥 3기 신도시 토지 투기 의혹에 대해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내놓은 발언이었다. 변 장관은 “(LH 직원들이) 정황상 개발정보를 알고 토지를 미리 구입했다기보다는 신도시 개발이 안될 걸로 알고 취득했는데, 갑자기 지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LH 직원들이 ‘우연히, 그것도 개발 될 줄도 모르고’ 땅을 샀을 뿐이라고 두둔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후 우연히 신드롬은 ‘땅 샀더니 신도시 됐다’라거나 ‘LH도 신내림 직원 있었구나’ 등의 다양한 형태의 패러디를 불러왔다. 지난 5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심을 살피기 위해 강원도 춘천 중앙시장을 찾았다가 시민이 던진 달걀을 맞았다. 그러자 “달걀을 무심코 던졌는데 우연히 이낙연 대표가 맞은 것이다” 등의 패러디가 쏟아졌다.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변명하는 것은 여권의 단골 해명이기도 했다.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져 나온 2019년 하반기 때다.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김기현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울산시장 후보에 대한 울산지방경찰청(당시 청장 황운하) 비리 수사가 ‘청와대 하명’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청와대 관계자와 제보자가 짜고 치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청와대는 “(제보를 받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과 제보자는 캠핑장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사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그렇지만 우연히 만났다는 제보자가 당시 선거에서 당선된 송철호 현 시장의 핵심 측근인 송병기 현 울산 경제부시장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검찰의 본격 수사를 불러왔다.

‘검언유착 의혹’ 수사 도중 한동훈 검사장을 독직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정진웅 광주지검 차장검사도 우연을 강조했다. 그는 “우연히 제가 한 검사장의 몸 위에 밀착된 것은 맞지만, 이는 휴대전화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은 것일 뿐 폭행이 아니다”고 말했다.

야당이라고 해서 ‘우연히 신드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산시장 재보궐선거에 나서는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의 엘시티 분양권 매매 과정을 놓고 벌인 여야간 공방에서도 ‘우연히’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박 후보 측과 부동산 중개인이 우연히 만나 분양권 전매계약 도움을 주고받았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특혜 의혹에 우연이라는 변명을 했다가 화를 키웠다. 2016년 ‘비선실세’ 최서원씨의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특혜 입학 의혹이 일던 당시였다. 이화여대 현장조사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정씨의 입학연도인 2015학년도에 때마침 승마가 체육 특기 종목에 포함된 이유를 묻자 이화여대 측은 “우연의 일치”라고 받아쳤다. 그러나 이 말 때문에 이대생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검찰의 대대적 수사로 이어졌다.

문제는 고위층의 잇따른 ‘우연히 신드롬’이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빌라 아래층에 사는 여성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잡힌 남성이 “우연히 누른 도어락 비밀번호가 일치했다”고 변명한다. 해외 원정도박으로 입건된 아이돌 그룹 멤버는 “필리핀에 갔다가 우연히 도박을 하게 됐다”고 둘러친다. 가격표 바꿔치기로 고가의 와인을 상습적으로 훔친 남성은 “우연히 싼 가격표를 붙여보니 되더라”고 한다. 심지어 미성년자 성착취 동영상을 유포하는 ‘박사방’ 이용자들마저 “우연히 보게 됐다”며 면책을 요구하고 있는 정도다.

더 이상 우연을 가장한 변명이 통하는 사회가 돼서는 곤란하다. 궁색한 변명이야말로 오만이며, 구차한 변명이야말로 쓰레기임을 왜 모르는가. 더 이상 ‘우연히’라는 단어가 바이러스가 돼 코로나19처럼 이 사회를 마비시키는 걸 두고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연히 봄이 온 줄 알았다는 변명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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