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진 관장
▲ 김상진 관장
김상진

수성구립용학도서관 관장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점심 메뉴까지도 큐레이팅하는 세상이 됐다고 한다. 원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쓰이던 큐레이팅(curating)이란 용어의 쓰임새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 것이다. 바야흐로 ‘큐레이션(curation)의 시대’가 됐다. 몇 해 전에는 ‘선택은 어떻게 세상의 가치를 창조하게 되었는가’란 부제를 단 ‘큐레이셔니즘’이란 책이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큐레이션은 창조의 영역인 저작물의 원형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제2의 창조’로 평가받고 있다.

큐레이션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기획자를 의미하는 큐레이터(curator)에서 파생된 용어다.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사회에서 큐레이션은 ‘정보나 콘텐츠를 선택적으로 골라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제공하는 행위’를 포괄하는 단어로 두루 사용된다. 그리고 큐레이터는 ‘보살피다’, ‘관리하다’는 뜻의 라틴어 ‘쿠라(cur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큐레이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자료를 수집, 보존, 관리, 전시, 조사 및 이와 관련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을 지칭했다. 또한 큐레이팅은 큐레이션에다 큐레이터의 활동까지 포함하는 의미다.

특히 지식정보사회를 지나 지능정보사회를 맞으면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생산되는 오늘날 큐레이션의 영역과 기능은 확대되고 있다. 확대 재생산이 용이한 디지털 방식으로 가공된 정보를 수집 및 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선별된 양질의 정보에 대한 수요가 커진다. 큐레이션은 이런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큐레이터의 역량에 따라 지식정보의 부가가치는 무궁무진하게 확대될 수 있다. 다양한 자료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조합해내는 파워블로거,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거대한 집단지성을 형성한 위키피디아, 스마트폰에서 유용한 정보를 모아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 등이 큐레이션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직접 취재해 제작하지 않더라도 뉴스를 다양한 형태로 재가공해서 보여주는 ‘뉴스 큐레이팅’, 뮤직 페스티벌에서 음악을 고르는 것을 ‘뮤직 큐레이팅’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급 수제 치즈나 전채요리를 고르는 사람을 큐레이터라고 하기도 한다.

지식정보를 바탕으로 탄생된 콘텐츠로 큐레이션의 대상을 삼아보면 가치는 더욱 커진다. 정보의 디지털화로 불거진 정보 과잉 상황을 전제로 삼는 ‘콘텐츠 큐레이션’은 이용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정보의 노출량을 늘리고, 선택 가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정보의 생산과 전달, 공유 등을 목적으로 하는 영역에서는 활용 범위가 넓다. 그 기반에는 빅데이터 분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콘텐츠 큐레이션의 활용 범주를 소셜 미디어, 뉴스 제공 서비스, 전자상거래 분야로 크게 나누기도 한다.

인류가 생산한 지식정보의 보고인 도서관에서도 요즘 큐레이션이란 용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책을 대상으로 삼는 ‘북 큐레이션’이 대표적이다. 책 선택에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을 위해 사서가 주제를 선정해 독자와 책을 연결해 주는 서비스다. 사서가 제공하는 추천도서와 유사하지만, 이용자들이 손쉽게 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기법을 활용하는 것이 차이점이다. 북 큐레이션을 담당하는 사서의 역량에 따라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책, DVD, 뉴스기사, 학술논문 등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북 큐레이션은 단순히 자료실에서 진행되는 추천도서 전시에 그치지 않는다. 도서관이 책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부터 큐레이션이 이뤄지고 있다. 전자출판의 등장으로 책을 출간하는 일이 이전보다 쉬워지면서 책의 생산량도 자연스럽게 늘어났기 때문에 선택의 과정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책이 귀한 시절에도 사서들은 양서(良書)만을 큐레이션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책 등은 절대 도서관에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큐레이션이란 용어가 생겨나기 전부터 도서관에서는 큐레이팅이 이뤄졌으며, 사서는 지식정보 큐레이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식과 정보를 담는 매체가 책을 뛰어넘으면서 도서관이 큐레이팅해야 할 대상은 한층 많아졌다. 도서관에서 보유한 콘텐츠 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콘텐츠도 사서가 큐레이팅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사서들은 지식정보 큐레이팅을 통해 박물관, 미술관, 야영장, 공원, 학교, 자원재활용센터 등 다른 오프라인 공간에 존재하는 콘텐츠도 이용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를 두고 수성구립도서관에서는 도서관이 제공하는 지식정보의 범위를 확장한다는 의미로 ‘도서관 밖 도서관’이란 개념을 설정,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도서관 밖 도서관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도서관 운영의 확장성을 구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도서관이란 제한된 공간, 제한된 예산, 제한된 인력의 한계를 극복해 이용자에게 필요한 지식정보와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한 방책인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이 지식정보 소비자에서 지식정보 생산자로 역할을 확대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도서관 안팎에서 수집된 다양한 지식정보의 개방과 공유를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용자에게 제공할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자신의 힘으로 직접 구현하는 창조활동을 의미하는 메이커 운동 차원에서도 지식정보 큐레이션 또는 콘텐츠 큐레이션이 도서관에 제격이다. 그 결과가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시 또는 수필 쓰기 등 글쓰기로, 디지털 방식으로는 요즘 대세인 1인 미디어 시대에 걸맞게 영상 만들기가 된다. 도서관이 지식정보 및 콘텐츠를 창조하는 메이커 스페이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혜택은 온전히 도서관 이용자인 시민에게, 지역주민에게 돌아가도록 설계돼야 한다. 도서관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민역량 강화이기 때문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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