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욱
▲ 김시욱
김시욱

에녹 원장

지천으로 꽃이 피는 계절이다. 노란 개나리와 하얀 벚꽃이 지난한 겨울을 잊게 한다. 계절이 갖는 특성이듯 하루가 다르게 날씨 변덕이 따르지만 그래도 꽃들은 어김없이 핀다. 예년의 기억이라면 새로움과 희망을 나누었을 시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 봄은 마음에 들어올 따스함이 더디기만 하다. 코로나19 백신접종이 시작됐지만 아직도 확진자 숫자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2여년 가까이 지속된 코로나19 사태로 소상공인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된 LH신도시 투기는 국민들의 피폐해진 마음에 더 큰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내부 자료를 이용한 LH직원 및 사회지도층과 권력층이 개입된 투기란 점에서 일반 국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촛불혁명’을 통해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을 교도소로 보내고 출범한 현 정권에서 생긴 일이라 더더욱 그 상실감은 크다 하겠다.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대통령의 말은 희화화된 지 오래다. 임기 내내 적폐청산에 치중해 왔건만 새로운 적폐세력이 그 자리를 채우는 듯해 보인다. 누구를 위한 공정이었으며 누구를 위한 정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지지 세력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선택적’ 공정과 정의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흔히 우리는 마적(馬賊)이라고 하면 촌락을 습격하고 약탈행위를 자행하는 도적떼로 오해한다. 청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마적은 보갑제도 등 중국 촌락공동체의 민중자위조직에 근간을 둔 무장집단이다. 각 집단은 적게는 7인을 단위로, 많게는 수백 명이 넘는 조직원으로 구성돼 있었다. 지방의 탐관오리와 지방군벌 등의 착취와 약탈행위로부터 지역 주민을 지키기 위한 취지로 결성된 조직이었다. 심지어 부패한 정부를 대신해 외적에 저항해 싸웠으며 영웅적이고 의협적인 행동으로 지역민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마적의 내부규율은 매우 엄격했으며 자기들의 향리 및 세력범위 안에서는 주민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취지는 퇴색돼 ‘장쩌린’과 같은 부패한 군벌세력으로 성장한 조직도 나왔다. 더불어 지역적 자위조직이라는 한계적 상황은 다른 지역을 침입할 경우, 여느 도적떼와 다름없는 약탈과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만주사변을 겪으면서 마적과 도적떼는 구별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일본에 의해 토벌됐다. 평상시 상업에 종사하며 단순히 자신들의 근거지와 지역 주민을 지킨다는 명분 자체가 어쩌면 ‘선택적’ 정의였는지 모른다. 태생적 한계로 인해 전국적 규모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적에 의해 토벌된 점은 자못 안타깝다.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 터진 LH투기 사건으로 정치권은 연일 공방을 주고받고 있다. LH 전·현직 직원과 친인척 그리고 국회의원 전원에 대한 전수조사, 특검, 국정조사권에 이르기까지 여야의 치열한 대치는 보궐선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심지어 후보자의 친인척과 현직 국회의원의 비리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채우고 당사자는 정치적 음해라며 부인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선거를 앞 둔 마타도어(흑색선전)는 ‘아니면 말고’식의 우리 정치의 저급한 모습이었기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국민들은 혼란에 빠지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지역과 주거지를 위해 영웅이 되고자 한 마적들의 모습처럼 득표 전략을 염두에 둔 진영논리는 국민 전체를 위한 대의를 잊은 지 오래인 것 같다. 고질적인 부동산 투기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는 뒤로하고 오직 ‘네 탓’으로 떠넘기기 바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무회의를 통해 “부동산 적폐를 청산한다면, 우리나라가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불어, 정부는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혁파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으며 권력 적폐 청산을 시작으로 갑질 근절과 채용 비리 등 생활 적폐를 일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적폐’와 ‘공정’이 현 정권의 그림 속 ‘상징화’된 단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최선이란 단어가 낯설기만 한 것은 또 다른 원인자를 찾고자 하는 ‘내로남불’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마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아니던가. 지나간 적폐를 도려내기 위해선 칼을 쥔 자들의 가슴과 양심이 깨끗하고 뜨거워야 함은 자명하다. 과감히 썩어가는 자신의 양심을 도려내고 대의를 바라볼 때 시장선거나 정권 재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역사는 늘 미래를 보여준다. 자신과 지역적 소영웅주의에 물든 마적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나타날까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