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경주 간묘(諫墓)…신라 충신 김후직의 무덤

경주 간묘는 신라 진평왕 때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을 지닌 충신 김후직의 묘이다. 김후직은 지나치게 사냥을 좋아하는 진평왕이 사냥을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듣지 않자 왕이 사냥 다니는 길목에 자신을 묻으라는 유언을 남겨 죽은 뒤에라도 간언하겠다고 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감동하여 다시는 사냥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묘는 일반 원형 봉토분이며 면적 1천 990㎡이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경주 간묘(諫墓), 신라의 충신 김후직(金后稷)의 무덤

세상이 상당히 어지럽다. 현역에서 물러나 가능하면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나라의 돌아가는 꼴이 정상적이지 못한 것 같다. 약속을 쉽게 저버리거나 심지어 거짓말까지 일삼는 최고 지도자들의 처신도 그러하고, 그 주변에 얼쩡거리는 자들이 하나같이 코앞에 어른거리는 소인배적 이해관계에만 탐닉해 어제 했던 말과 오늘의 행동이 판연히 달라져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얼굴 한번 붉히지 않는 철면피 같은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나 자신이 할 말을 잊는다.

긴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례가 없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이 발전과 도약의 길로 나섰던 나라에는 추상같은 어조로 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과오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었던 충신의 직간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체로 혼란과 쇠퇴가 거듭되다가 결국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이를 하나의 교훈으로 삼는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치는 당혹스러운 정치사회적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직간(直諫)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긴 호흡과 넓은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면서 나라 안팎의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자세를 촉구하는 준엄한 꾸짖음의 목소리가 그리운 시대이다.

조선 숙종 36년(1710)에 경주 부윤 남지훈이 김후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비.


◆직간(直諫)이 그리운 시대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가운데서 이런 민초들의 소망이 담긴 유적이 하나 남아 있어 소개해 두고자 한다. 바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간묘가 그것이다.

김후직(金后稷)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묘는 현재 황성공원 뒤편 주택가 가운데 좁은 길옆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중형급의 원형 봉토 무덤이다.

무덤 앞에는 아담한 상석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앞면에 “신라 간신 김후직묘(新羅 諫臣 金后稷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1710년(숙종 36)에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쓴 지문(誌文)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남지훈은 ‘동경지(東京誌)’에 수록된 김후직의 행적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고 난 뒤에까지 국왕인 진평왕에게 간언해 그릇된 행동을 고치게 했으므로 이를 “묘간(墓諫)”이라고 하면서, 중국 춘추시대 시신(屍身)이 된 사어(史魚)가 위 영공(靈公)에게 간언해 잘못을 고치게 했다는 “시간(屍諫)”에 비길만한 가치 있는 행위였음을 찬양했다. 어쩌면 공자가 사어에 대해 ‘화살처럼 곧은 군자’라고 평가했던 사실에 자극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사실 간묘가 김후직의 무덤인지 여부는 역사학이나 고고학적 측면에서 검증되지 않았다. 무덤의 축조 시기나 입지 등에서 미루어 보면 무덤의 내부구조는 굴식 돌방무덤일 터이고, 그렇다면 후대에 도굴 등의 피해를 입어 설령 과학적 발굴조사를 시행한다고 해도 묘주(墓主)가 김후직인지를 밝혀내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무덤은 진평왕에게 죽어서 무덤에 묻힌 뒤에도 간언을 했던 충신 김후직의 무덤으로 구전돼 왔고, 조선시대의 각종 지방지에 거듭 수록되었던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정치가 어지럽고 사회가 혼란에 빠져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누군가가 직간을 통해 폐정(弊政)이 고쳐지기를 바랐던 민초들의 소박한 소망들이 이 무덤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죽어서 묘에서까지 임금에게 바른 말로 간(諫)하였다고해 김후직의 묘를 ‘간묘(諫墓)’라 한다.


◆김후직의 “묘간(墓諫)”

묘비를 지은 경주부윤 남지훈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경지’에서 김후직의 행적을 알게 됐지만,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면서 원전(原典)에 가장 가까운 것은‘삼국사기’ 김후직 열전(列傳)이다. 이제 열전에 근거해 관련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후직의 가계는 지증왕의 증손(曾孫)으로만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가 섬긴 신라의 25대 진평왕의 계보 또한 지증왕(고조)→법흥왕(증조)→진흥왕(조)→동륜태자(부)→진평왕으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두 사람은 멀어도 재종숙질 사이로서 김후직은 근친 왕족이었던 셈이다. 김후직은 580년(진평왕 2)에 이찬(伊湌)의 관등으로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됐다. 진평왕은 그의 숙부였던 24대 진지왕(眞智王)이 재위 4년 만에 난정(亂政)으로 나라를 어지럽혀 왕위에서 쫓겨난 후, 진골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김후직이 병권을 장악하는 병부령이라는 요직에 임명된 사실에서 보면, 그는 진평왕의 즉위에도 공이 컸던 훈신(勳臣)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얼마 후부터 진평왕은 자못 사냥을 좋아하게 되었다. 열전에는 이런 왕의 행태에 대해 병부령인 김후직이 간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면서,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광부(狂夫)・엽사(獵士)와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어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했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의 하나가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보면,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십시오”

김후직은 이름 자체가 중국 주나라의 시조이자 농업신의 명칭을 따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동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중국 문물에 매우 밝았던 인물이었다.

유학사상에 근거한 군왕의 덕치(德治)를 바탕에 깔고, 노자와 서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점이 이를 더욱 뒷받침해 준다. 다만 김후직의 이러한 지극한 간언이 거듭됐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즉위 공신이자 근친 왕족인 김후직의 건의를 진평왕이 거절한 셈인데, 이런 사단(事端)이 발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문면(文面) 그대로가 아니라 국왕과 귀족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본다.

사실 아버지 동륜태자가 요절해 숙부인 진지왕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왕손 백정(白淨; 진평왕의 즉위 전 이름)은 일단 왕위계승 후보에서 한 걸음 멀어진 존재가 됐다.

그러나 진지왕이 제대로 정치를 펴지 못하고 왕위에서 축출된 후, 유력 진골 귀족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즉위 사정으로 말미암아 그가 집권한 초기에는 아무래도 귀족들의 발언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야망이 컸던 젊은 진평왕은 각종 제도를 정비해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유력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그러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진평왕은 친히 인솔하는 친위 군사력을 양성해 자신만의 무력기반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결국 병부령 김후직의 간언의 대상이 된 진평왕의 빈번한 사냥 활동은 친위 군사력을 양성하고 있는 국왕과 이를 견제하면서 전통적인 특권을 고수하려는 진골 귀족간의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김후직의 간언을 수용하지 않은 진평왕은 마침내 친위 군사력으로 시위부(侍衛府)를 조직해 왕권을 보위하는 핵심 부대로 삼았으며, 귀족이 아니라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전제왕권 체제로 변모시켜 나갔다.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부령에서 물러난 김후직은 어쩌면 시대적 흐름과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치의 실현을 꿈꾸며, 병들어 죽을 즈음에 그의 아들 3명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남의 신하가 돼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했다. 아마 대왕이 놀이를 그치지 아니하면 패망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모름지기 내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으라”

아들들이 그 유언에 따라 왕의 사냥길 길목에 무덤을 조성했는데, 뒷날 왕이 다시 사냥길에 나갈 때, 무덤에서 “가지 마시오”라고 간언해 왕을 일깨웠고, 진평왕은 김후직의 충성심과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달아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오래된 고대 왕조의 사례이지만, 혼탁한 작금의 우리나라 사정을 돌아보면 생각할 바가 없지 않다. 옛날 멀리서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누군가 나타나 직언을 통해 현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새 시대가 다가오기를 바랐던 소망들이 간묘에서 돌아서는 발길을 붙잡는 듯 했다.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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