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앞 돌섬 위에 저 소나무 꼴값 좀 보소 뒤틀려 휘어져서 어덜 보고 있는감요/지금 니 거기 선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구마이//그냥 캭 죽으면 될 걸 죽지 못해 살고 있지라 이 뺨 저 뺨 오지게 맞고 막판에 울러 왔지라/사는 게 끝은 있어도 까닭은 없는 게비여//끗발이 죽었분디 뭔 일이 됐겄소만 잘못 만난 때는 있어도 잘못 태어난 사람 없지라/여그가 땅끝이라도 시작은 인자부터요

시조집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고요아침, 2020)

최영효 시인은 경남 함안 출생으로 1999년 현대시조 신인상, 200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 서라’, ‘노다지라예’, ‘죽고못사는’, ‘컵밥3000 오디세이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와 시조선집 ‘논객’ 등을 펴냈다. 그의 시조는 스케일이 크고 스펙트럼이 넓다. 또한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그의 시조 세계를 태산준령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정치하다. 세밀하면서도 도저한 깊이를 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기량과 시대를 꿰뚫는 혜안으로 새로운 시조의 광맥을 줄기차게 굴착 중이다. 지천명을 훌쩍 넘어 등단한 이후 눈부신 적공을 쌓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그가 문청 시절부터 열망을 가지고 문학의 길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50여 년의 산 체험은 그로 하여금 불굴의 시편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됐던 셈이다. 다섯 권의 시조집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해남’을 보자. 해남은 토말 즉 땅끝과 만나는 곳이다. 일찍이 꿈에 그리던 해남 땅끝 마을에 이르러 바닷물에 입맞춤한 기억이 있다. 또 한 번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해남’은 입말을 질펀하게 구사하고 있다. 땅끝 앞 돌섬 위에 저 소나무 꼴값 좀 보소 뒤틀려 휘어져서 어덜 보고 있는감요, 라고 화자는 다소 능청을 떨면서 말한다. 그러다가 지금 니 거기 선 채로 날 기다리고 있었구마이, 라면서 화답을 한다. 시의 화자는 그냥 캭 죽으면 될 걸 죽지 못해 살고 있지라 이 뺨 저 뺨 오지게 맞고 막판에 울러 왔지라, 라고 속사정을 토로하면서 사는 게 끝은 있어도 까닭은 없는 게비여, 라고 말한다. 사는 까닭이 따로 없음을 환기시킨다. 또 다른 깨달음이다. 끗발이 죽었분디 뭔 일이 됐겄소만 잘못 만난 때는 있어도 잘못 태어난 사람 없지라, 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 중에 잘못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다들 잘 태어난 사람인데 다만 하기 나름일 뿐이다. 각양각색의 삶이 모여 이루는 세상에서 여그가 땅끝이라도 시작은 인자부터요, 라는 화자의 마지막 발언에서 희망을 읽는다. 인제부터 시작하면 모든 일이 새롭게 열릴 것이다.

그는 단시조 ‘저 여자’에서 엄마만 살아 있고 여자는 벌써 죽었다, 라면서 연골이 다 닳은 나목과 벼락 맞은 옹이 몇 개가 새벽을 끌고 갔다가 신발에 끌려온 여자, 라고 노래하고 있다. 꽤나 아픈 시다. 여자는 이미 죽고 없고, 엄마만 살아 있는 정황은 삶의 현장 곳곳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 벼락 맞은 옹이와 연골이 다 닳은 나목이라는 은유가 저 여자의 현재 상황을 아프게 드러낸다. 그는 새벽을 끌고 갔지만 신발에 끌려온 여자다.

최영효 시인, 그는 이즈음 역사의식을 근간으로 해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인 ‘우금치’를 수차례 찾아 발품을 팔면서 서사시조집을 구상 중이다. 시조의 새로운 진경이 열릴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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