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룡산 좋다 하여 유산차로 예왔는냐?/성천강 맑다 하여 뱃놀이로 예 왔는냐?/아니라, 광풍이 하 세니, 지향 없이 왔노라//벽돌담에 둘러서, 열 길이나 높아 있고,/겹겹이 닫힌 문에, 낮밤으로 지켜 있다/지상이 척척 곧 천리라 저승인가 하노라

「함흥 형무소」(시조정신 7호, 2020)

외솔 최현배 선생은 1894년 울산 출생으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10년 상경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15년 졸업했다. 그 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입학해 1919년 졸업하고, 1922년 4월에 일본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국어학자, 국어 운동가였다. 다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 ‘우리말본’, ‘한글갈’, ‘조선민족 갱생의 도’, ‘나라 사랑의 길’ 등이 있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가 1970년에 창립돼 기관지 ‘나라사랑’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몇 해 전 외솔시조문학선양회에서 외솔시조문학상을 제정해 외솔시조 선양 사업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다. 이 일은 시조문학의 저변 확대와 질적 향상, 외솔정신의 위의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외솔 선생은 민족의식의 형상적 반영으로서 시조를 창작했다. 이 점을 두고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민족과 한글과 시조의 트라이앵글이라고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적절한 해석이다. 외솔 선생의 시조는 실로 엄혹한 역사와 그 궤를 함께했다. ‘함흥 형무소’를 보라. 선생의 절조가 오롯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반룡산 좋다 하여 유산차로 예왔는냐?, 라고 묻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장강 성천강이 맑다 해 뱃놀이로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시대의 광풍이 너무나도 드세어서 그 어떤 지향도 없이 끌려온 것일 뿐이다. 그렇게 외솔 선생은 시대의 죄수가 돼 열 길이나 높은 벽돌담에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겹겹이 닫힌 문을 향해 지상이 척척인데 천리처럼 느껴져 저승 같기만 하다고 읊조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민족운동의 결과로 빚어진 투옥 과정과 그에 따르는 고통은 역설적으로 그의 옥중시조를 가능케 해준 원질이었다고 본 유성호의 시각은 주목할 만하다.

또 한 편의 옥중시조를 보자. ‘나날의 살이’다. 아랫목은 식당 되고, 윗목은 뒷간이라 물통을 책상으로 삼고 책으로 벗 삼으니 봄바람 가을비 소리 창밖으로 지나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봄바람 가을비 소리가 창밖으로 지나는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웠을까. 그 심경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앉으니 해가 지고 누우니 밤이 새고 있고, 보느니 옛글이요 듣느니 기적이라면서 궁금타 세계사 빛이 어디로 드는지 생각한다. 영어의 몸이면서도 세계사의 빛을 떠올리고 있는 점이 놀랍다. 선생의 기개와 스케일을 엿본다. 이어서 벽력같은 기상 호령에 놀라서 일어나니 네 벽만 들러 있고 말동무 하나 없어서 외로운 독방 고생이 새벽마다 새로운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리고 쓸쓸한 감방 속에 홀로 앉았으니 창밖에 까치 소리 아침볕에 분명해서 오늘이 며칠인가 하면서 혹여 기쁜 소식이 오지 않을까 못내 고대한다. 수인이면서도 꿋꿋이 자존을 지키며, 나라 걱정과 세계사의 흐름을 예의주시 중이다. 대인의 풍모다.

옥중시조가 창작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외솔 선생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서 지금도 여전히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외솔시조를 거울삼아 정신의 위의를 시조로 세우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할 때다.

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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