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불교의 창시자 원효, 요석궁에서 요석공주 만나 문장가 설총 탄생

▲ 원효는 신라의 왕실불교를 대중불교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혼자 공부한 시간이 대부분이다. 원효가 오어사에 주석하던 혜공을 만나 많은 문답을 나눴다. 오어사의 원효대사 진영.
▲ 원효는 신라의 왕실불교를 대중불교로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혼자 공부한 시간이 대부분이다. 원효가 오어사에 주석하던 혜공을 만나 많은 문답을 나눴다. 오어사의 원효대사 진영.






원효대사는 이미 신라 흥륜사십성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그의 행보가 광범위 하고 이루어 놓은 실적이 많아 다시 상편과 하편으로 나눠 소개한다.



상편에서는 그가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의 과정과 요석공주를 만나 설총을 낳은 내력을 이야기한다.



하편에서 ‘원효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통틀어 조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원효는 신라시대 경산지역에서 평범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인사들은 대부분 왕족으로 부유하고 귀한 신분의 젊은이들이었다.

원효는 의상의 사형이라는 신분으로 의상과 함께 두 차례나 중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원효는 신분의 벽을 넘어 불교에 대한 갈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서 깨달음을 얻어 신라로 되돌아와 대중 불교를 퍼뜨리는데 열중했다.

귀족불교에서 대중 불교로의 전환은 원효의 신분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인도 광유선승이 창건한 임정사와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에서 첫글자를 따서 원효가 신라시대 중창한 기림사.
▲ 인도 광유선승이 창건한 임정사와 석가모니의 기원정사에서 첫글자를 따서 원효가 신라시대 중창한 기림사.


◆삼국유사: 원효와 요석

성사 원효의 세속 성은 설씨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적대라는 연못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원효는 처음 압량군의 남쪽에 있는 불지촌 북쪽 밤나무골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의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이라고도 한다. 사라수에 대해 세간에서는 말하기를 스님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을 해 만삭이 됐을 때 마침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밤나무 아래에서 갑자기 해산했다.

너무 급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만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수라 부른다고 했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의 것과 달라서 지금까지도 사라율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주지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 줬더니 종이 관청에 소송을 제기했다.

관리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밤알 하나가 밥그릇에 가득 찼다.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그래서 이름을 밤나무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 원효가 누교를 건너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말리려 요석궁에 들어 설총을 낳게 됐다고 한다. 월정교 아래 누교가 있었다고 전하는 곳.
▲ 원효가 누교를 건너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말리려 요석궁에 들어 설총을 낳게 됐다고 한다. 월정교 아래 누교가 있었다고 전하는 곳.


스님은 출가하자 그의 집을 희사해서 절로 만들고 이름을 초개사라 하고 사라수 나무 옆에 세운 절을 사라사라 했다.

스님의 행장에는 서울사람이다라 했으나 이것은 그의 할아버지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에는 본래 하상주 사람이다라고 했다.



살펴보면 인덕 2년(665) 무렵에 문무왕이 상주와 하주의 땅을 떼어 삽량주를 설치했는데 하주는 바로 지금의 창녕군이다.

압량군은 본래 하주에 속한 현이다.

상주(上州)는 지금의 상주(尙州)로서 또한 상주(湘州)로도 쓴다. 불지촌은 지금의 자인현에 속해 있으며 이는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것이다.



스님의 처음 아명은 서당이며 또 하나의 이름은 신당이었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가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더니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해산할 즈음에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때가 진평왕 39년(617), 대업 13년 정축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스승을 좇지 않고 학문을 닦았다.

스님이 여러 지방으로 다니며 수행한 전체의 내력과 불교를 널리 편 많은 업적들은 당전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다만 향전에 실린 한두 가지의 특이한 사적만 기록한다.



스님은 언젠가 하루는 상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어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요석궁은 지금의 교촌마을이다. 그 이름을 딴 경주최부잣집 반가한정식 요석궁.
▲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요석궁은 지금의 교촌마을이다. 그 이름을 딴 경주최부잣집 반가한정식 요석궁.




그 누구도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기를 “이 스님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나라의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데려오게 했다.

왕의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러간 관리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만나게 됐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성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겨 말리게 하고 거기에 머무르게 했더니 공주가 그만 임신해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니 신라의 현인 열명 중 한 사람이 됐다. 설총은 방언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방풍속과 물건 이름에도 통달하고 사리를 깨달아 6경과 문학의 뜻을 풀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수하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다. 그 모양이 진기해 그 형상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 있는 일체 무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구절에서 무애라 이름 짓고 이에 따라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으며 돌아오니 가난뱅이는 물론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됐고, 그들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읊게 됐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







▲ 신라 요석궁이 있었던 마을 전경.
▲ 신라 요석궁이 있었던 마을 전경.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의 선택



원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가족은 물론 마을에서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적극 추천해 12세가 되기 바쁘게 원효는 화랑이 되어 청소년들과 전국을 여행하며 심신을 단련했다. 16세부터 전쟁터에 나가 화랑도의 정신을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했다.



평소에 온화하고 따뜻하던 그의 성품은 전쟁터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적의 목에 창을 박아 넣는 일에도 한 치의 서슴이 없었다. “적군을 죽이지 않으면 동료이자 내 친구들이 죽기 때문”이라며 원효는 전쟁터에서는 가장 앞줄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들어 막무가내로 창칼을 휘둘렀다. 원효의 동분서주하는 공격은 적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 오어사 박물관에 보관된 원효대사가 생전에 쓰고 다녔다는 삿갓.
▲ 오어사 박물관에 보관된 원효대사가 생전에 쓰고 다녔다는 삿갓.


원효가 군인으로 전쟁터에 참전한지 2년도 되지 않아 그의 용맹함은 신라군은 물론 백제, 고구려까지 널리 소문이 났다. 신라에는 영웅, 적군들에게는 악마요 저승사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의 영웅담은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죽은 전우의 시신을 혈혈단신으로 달려 들어가 등에 업고 돌아온 사건 이후로 봄바람에 들불처럼 번졌다. 그로부터 원효는 화랑들의 세계에 영원한 전설이 됐다.



그러나 원효의 영웅시대는 길게 가지 못했다. 원효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화랑과 전쟁의 활극은 완전히 잊었다. 오로지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원효는 친구들조차 만나지 않았다. 먹는 것도 하루 한 끼 정도 겨우 주변의 권유에 의해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정도였다.





▲ 원효대사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분황사에 고려 숙종이 내린 시호를 새긴 화쟁국사비부의 받침돌. 화쟁국사비에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받침돌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이 남아있다.
▲ 원효대사가 100여 종 24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분황사에 고려 숙종이 내린 시호를 새긴 화쟁국사비부의 받침돌. 화쟁국사비에는 원효대사를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받침돌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이 남아있다.




삼년상을 치른 원효는 바로 머리를 깎고 구도의 길을 택했다. 건장하던 그의 어깨는 어느새 구부정하게 휘어져갔다. 한 번 생각에 빠져들면 1주일씩 몸이 홀쭉해지도록 끼니를 건너가며 무서울 정도로 면벽수행을 이어갔다.



원효는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다.

일체유심조,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문득 깨우치고는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외치고 다녔다. 거지와 함께 자기도 하고, 부녀자든 어린이든 만나면 노래하고 웃으며 아미타불을 암송하게 했다.



그러다 원효는 문득 혼자 성불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불가함을 깨닫고 왕실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그래서 요석공주와 관계를 맺어 왕실의 재력으로 백성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나눠 주기로 했다.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 무덤으로 전해지는 보문들 남촌마을의 고분.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 무덤으로 전해지는 보문들 남촌마을의 고분.


이즈음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을 앞두고 무열왕은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정치적 이념을 체계화할 인물을 찾던 중 원효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원효와 태종 무열왕의 뜻이 맞아 설총이 태어났다.

요석공주도 결혼하고 불과 3일 밤을 보내고 전쟁터에서 주검이 돼 돌아온 남편보다 그를 업고 온 건장한 원효의 얼굴이 가슴에 계속 남아 있었다. 아버지와 그의 뜻이 요석공주의 떨치지 못한 꿈과도 합치한 것이다.



원효는 분황사에서 백성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이론을 책으로 펴내는데 심혈을 기울이게 됐고, 요석은 설총을 낳아 세계적인 문장가로 키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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