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신축년 첫날부터 사람들이 뜸한 산과 들, 강과 호수, 바다를 찾아다니며 매일 만 보 이상 걸었다. 철새의 자맥질, 고라니의 뜀박질, 홍시를 쪼아 먹는 동박새, 강변 왕버들, 절벽의 해송, 눈이 시리도록 파란 겨울 하늘과 조각구름 등 자연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모습은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모처럼 마주하는 한겨울의 칼바람도 싫지 않았다.

겨울 산을 오르거나 빈 들녘을 걸을 때 늘 암송하는 시가 있다. 조정권의 ‘산정묘지’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산정은/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빛을 받들고 있다./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산정묘지 1)” 조정권은 문예진흥원에서 오래 근무했다. 문학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쟁 수단이던 7, 80년대를 살면서 그는 ‘참여와 순수’, ‘진보와 보수’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진저리나도록 봤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두 집단을 다 지원해야 하는 일을 해야 했다. 민중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에는 저항이란 대의만 앞세우면 미학적 측면에서 부족함이 있어도 좋은 시로 인정받았다. 작품성과 미학적 성취가 돋보여도 현실 문제를 비켜 가면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는 두 집단의 대립과 갈등을 보며 이 둘의 단점을 극복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그는 순수와 민중시를 봉합하고, 그 둘을 합쳐서 승화시킨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결과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것이 ‘산정묘지’ 연작이었다”라는 조용호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전통 서정시에 기반하면서도 고고한 정신성을 지향하는 1990년대의 정신주의 시를 이끌었다.

새해 벽두 산정묘지의 빛나는 시구들을 음미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끊임없이 편 가르기를 하며 어느 한쪽에 가담하라고 다그치는 오만과 독선에 가득 찬 진보와 부패와 타락, 분열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보수, 두 집단 모두를 자극하여 새살이 돋아나게 해 줄 ‘산정묘지’ 같은 고결한 정신이 출현하게 해 주십시오. 유종호가 조정권의 시를 해설하며 언급한 ‘위엄과 기품’이 이 땅의 모든 분야에서 되살아나게 해 주소서.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삿대질하며 싸우지 말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며 내 것을 조금 양보하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주십시오. 젊은이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아무 대책 없이 일자리를 잃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젊은이들이 차선의 일자리라도 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생명의 존엄성을 절실히 깨닫게 해 주셔서 다시는 정인이와 같은 불행한 아이가 생겨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모든 장애인이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사람 사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외롭고 쓸쓸한 홀몸노인들에게 온정의 손길이 닿게 해 주십시오. 쓰레기통을 뒤지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는 주지 않아도 가혹한 학대는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모든 언론 매체들이 정치적 이슈나 사건 사고만 머리기사로 다루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사를 톱으로 올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꿈꾸는 것이 허황한 공상이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치라고 조롱당하지 않고, 그 꿈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다시 길을 걷는다. 맑은 정신으로 산정묘지를 계속 읊조리며 나태한 정신을 지팡이로 후려쳐 본다.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하나의 형상 역시/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나의 영혼이/이 침묵 속에서/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산정묘지 1)”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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