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95>원광법사(상)

중국에서도 이름을 날린 원광법사, 신라 화랑들의 세속오계 지어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깊은 계곡에 위치한 금곡사와 금곡사지 부도탑 전경. 금곡사는 삼국유사에 원광법사가 입적한 이후 부도탑을 세운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광법사는 신라십성에 이름은 오르지 않아도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조정에서조차 그의 공부를 높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이 중국에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돌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의 수련지침을 마련했다.

청소년들이 수련하는 지침으로 삼았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상으로 삼을 계율로 전해온다.

그는 당시 중국으로 보내는 나라의 문서는 물론 왕실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삼국유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당나라의 속고승전과 수이전 두 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각각 소개했다.

두 기록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와 설씨로 다르게, 또 죽음에 이른 나이도 99세, 84세로 다르게 전한다.

속고승전과 수이전에 전하는 원광법사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있는 경주 안강읍의 금곡사 약사전의 모습.


◆삼국유사: 원광법사

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

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다.

또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해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다.

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도 모자라지 않았다.

끝내 스물다섯 살에 친척과 벗들을 떠나 배를 타고 중국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

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

원광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했더니 칙명으로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돼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경주 안강읍 두류리의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의 모습.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그리해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

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해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

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삼층석탑 모양으로 조성된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의 모습. 몸돌에 감실을 만들고 불상을 양각으로 새겨 특이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다.

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

원광이 위기에 임해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서울로 와서 지냈다.

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서울에 높이 드날렸다.

멀리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했다.

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

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경주 석장동 화랑마을에 화랑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게 전망 좋은 곳에 지은 정자.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

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9세이니 바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었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

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경주 청소년수련시설 화랑마을 입구에 화랑상 동상을 세워두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

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 숲을 내달렸다.

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

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지어주며 주석했던 곳으로 운문사라는 기록이 있다. 운문사의 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

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운문사의 전신인 신라시대 대작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에 보물 제317호와 318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가 봉안된 모습.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

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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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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