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고향 마을에는 조그마한 교회가 있었다. 인근 네 개 동네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었다. 매일 새벽과 저녁에는 종탑에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기독교 신자보다 불교 신자가 더 많았지만 아무도 교회 종소리를 시끄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을 뒷산에는 절도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의 종소리와 절의 범종 소리를 같이 들으며 살았다. 교회의 종소리는 카랑카랑한 고음이어서 힘차게 새날을 여는 아침에 어울렸다. 저음의 범종 소리는 평안한 휴식과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해 주어 저녁 시간에 듣기 좋았다.

마을 한 복판에 있는 교회는 문화 공간 역할도 했다. 여름 성경학교와 성탄절에는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교회에 갔다. 성경학교의 다양한 프로그램은 문화 충격이었다. 불교 신자 집 아이들도 그 시기에는 교회에 갔다. 아이들은 맨 마지막에 주는 간식을 기다리며 청년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노래를 부르고 성경을 암송했다. 성탄절에는 어김없이 연극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아기 예수 역을 맡았다. 동년배의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작아 그 역을 주었을 것이다. 고교 1학년 누나가 성모 마리아 역을 했다. 연극 도중 누나가 나를 꼭 껴안았을 때의 그 달콤한 로션 향기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야릇한 느낌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조숙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여성의 품을 처음 느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장면은 생각나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아련하게 떠 오른다. 성탄 전야 행사가 끝나면 청년들은 밤새 새벽송을 들었다. 신자들 집 앞에서 크리스마스 캐럴과 찬송가를 부르면 교인들은 정성껏 포장해 둔 과자와 다양한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언 손은 입김으로 녹이고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돌아다녔다. 눈이 듬뿍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들판과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눈싸움을 했다. 외딴곳에 홀로 사는 노인의 집 앞에서는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고, 다른 집에서 받은 선물을 섬돌 위에 몰래 얹어 놓고 나왔다. 부자 장로님 댁에 이를 때면 모두 들뜨고 신이 났다. 장로님은 떡국을 끓여 우리를 배불리 먹였다. 새벽 6시쯤 새벽송이 끝나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 정오 무렵까지 자고 교회에 나와 과자를 나눠 먹으며 파티를 했다. 동네 악동들이 사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스님이 주는 떡을 맛있게 먹곤 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훈훈한 인정이 넘치던 그 시절을 아직도 가슴 한쪽에 고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몇십 년 사이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사회 전 분야가 그렇듯이 교회도 빈부 격차가 극심하다. 대도시 일부 교회는 엄청난 부를 주체할 수 없어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작은 개척 교회나 시골 교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작은 교회를 거의 빈사 상태로 내몰고 있다. 여유 있는 대형 교회들이 어려운 교회를 좀 더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재림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 코로나19로 고통받는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을 먼저 위로하며 복을 줄 것이다. 그런 다음 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할 것이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교회도 방역 당국의 지시를 철저하게 지키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격하게 실천하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사는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이 곧 예수 당신을 접대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할 것이다.(마태복음 25장). 부처님도 자신에게 보시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 당신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는가(방등경). 예수의 말씀이나 석가모니의 설법이 결국은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쁜 성탄이다. 산타의 썰매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 위로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외딴 마을을 떠 올려 본다.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풍경 속에 나지막하게 잠겨있는 시골 성당의 첨탑 위에는 아기별 하나가 사랑을 실천하러 온 예수님을 기다리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다. 코로나19와 굵직한 사건들에 파묻혀 세상의 관심 밖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탄의 기쁨과 신의 은총이 가득하길 기원해 본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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