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93>오대산 오만진신

자장법사, 오대산서 월정사 창건 후 부처 오만진신 만나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공부하던 중 오대산의 진신을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오대산에서 부처를 만나기 위해 초막을 짓고 기도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자장법사가 기도하던 곳이 월정사 자리라 해 지금까지 불법을 전하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과 석불좌상.


오대산에는 지금도 유명한 절이 곳곳에 위치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역사학도, 문화관광탐방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가장 먼저 절을 지어 부처를 공양한 것은 자장법사다.

자장법사가 선덕여왕 대에 오대산에서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던 곳이 월정사이고, 처음 부처를 친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다시 들어간 곳이 정암사이다.

월정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상원사가 나오고, 사자암, 적멸보궁이 차례로 나타난다.

적멸보궁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하는 산길이다.

자장법사 이후에 신라의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가 무리에서 벗어나 오대산으로 숨어 수련에 매진했다.

효명태자는 다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를 성덕왕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보천태자는 왕권조차 외면하고 오로지 수련에 매달려 울진 장천굴(지금의 성류굴)과 오대산을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보천은 입적에 들면서 글을 남겨 오대산에 원통사, 금강사, 수정사, 백련사, 화엄사, 법륜사, 문수갑사 등의 절을 지어 밤낮으로 예참하라며 경비를 세금으로 충당하게 했다.

월정사 입구의 사천왕들이 지키는 천왕문.


◆삼국유사: 오대산 오만진신

산중고전을 살펴보면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처음으로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려고 선덕왕 대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태화지 못가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홀연히 문수보살이 네 구절로 된 게를 줬다.

자장이 꿈에서 깨어나 게를 기억할 수는 있었으나 모두 범어라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홀연히 승려 한 분이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가 사용하던 밥그릇 한 벌 및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으로 와서 “무엇 때문에 수심에 잠겨 있느냐”라고 물었다.

법사가 “꿈에 게 네 구절을 받았는데 범어라서 그 뜻을 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

그 스님이 “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것이며 달예치구야라는 무소유라는 말이고, 낭가희가낭은 이와 같은 법성을 알았다는 것이며, 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을 곧 친견한다는 말이다”라 번역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가사 등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이신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또 “그대 본국의 동북방에 있는 명주 땅 오대산에 1만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라”고 말을 하고는 사라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국보 제332호 수마노탑의 모습. 정암사 동남쪽 언덕에 있다.


법사가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서 재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용이 법사에게 “지난번에 게를 전한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고 했다.

자장법사는 정관 17년(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와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시 원녕사에 머물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뵙게 됐다고 한다.

그후 칡넝쿨이 얽혀 있는 곳으로 갔으니 지금의 정암사이다.

그 뒤에 범일의 제자인 승려 신의가 자장이 휴식하던 곳으로 찾아와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다.

신의가 죽자 암자 또한 오랫동안 버려져 못쓰게 됐는데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다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으니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이 절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온 후 정신대왕의 태자인 보천, 효명 두 형제가 하서부에 와서 각간 세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다음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편으로 가서 여러 날 동안 유람했다.

자장법사가 부처 진신을 만나기 위해 오대산에 갔다가 물러나와 다시 들어간 곳이 정암사이다. 정암사에도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인 적멸보궁이 있다.


어느 날 저녁에 두 형제는 속세를 벗어날 뜻을 두고 은밀하게 약속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도망해 오대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모시고 호위하던 자들은 태자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해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었다.

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니 이것을 보천암이라 했다.

여기서 동북쪽을 향해 600여 걸음을 가면 북대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아우 효명이 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면서 저마다 부지런히 불도를 닦았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올리려 하던 차에 동쪽 대인 만월산에 1만 명의 관음보살 진신이, 남쪽 대인 기린산에는 여덟 분의 큰 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서쪽 대인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북쪽 대인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명의 대아라한이, 중앙의 대인 풍로산은 혹은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부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 명이나 되는 보살의 진신께 일일이 예를 올렸다.

매일 새벽이면 문수보살이 진여원, 즉 지금의 상원에 와서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때로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보주 모양이 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부처의 눈 모습으로도 된다.

또는 부처의 손 모습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 모양, 또는 신통 모양, 또는 금으로 된 누각 모습이 되기도 한다.

또 금륜형 모양, 혹은 금강저 모양, 금으로 된 항아리 모양, 금비녀 모양, 혹은 부처의 발 모양, 번개 모양, 여래가 솟아오르는 모양, 지신이 솟아오르는 모양으로도 됐다.

정암사는 자장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정암사 뒤쪽에 마련된 자장법사의 초상을 모신 자장암.


두 태자가 매일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달여 올리고 밤이 되면 각자 암자에서 수도했다.

문수보살이 때로는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으로 성도기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에 이 산중에서 시행할 행사로서 국가에 도움이 될 일들을 기록하여 남겨 놓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다.

청색 방위인 동쪽 대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쪽 대의 남쪽 기슭 끝에 마땅히 관음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관음보살상과 푸른 바탕에 1만 명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

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금경과 인왕반야경과 천수다라니를 읽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원통사로 하라.

적색방위인 남대 남쪽면에는 지장방을 설치해 원만한 모습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

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금강사라 하라.

백색방위인 서대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무량수여래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

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아미타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수정사라 하라.

흑색방위인 북대의 남면에는 나한당을 설치하고 원만하신 석가여래상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 나한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

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백련사라 하라.

황색방위인 중대의 진여원에는 가운데에 문수보살과 부동명왕의 소상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서른여섯 가지로 변화하는 형상을 그려서 모시도록 하라.

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분수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화엄사로 하라.

1300년 전 자장율사의 지팡이가 자라 거목이 됐다가 말라죽었는데 가지가 자라 회생한 나무. 정암사 적멸보궁 옆의 지장수로 자장율사의 주장자라 부른다.


보천암을 고쳐 화장사라 하고 원만하신 모습의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라.

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외우게 하라.

해마다 100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곳을 법륜사라 하라.

이 화장사를 오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

행실이 깨끗하고 법력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경건하게 길이 공양을 하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릴 것이며 백성이 평안할 것이고 문무가 모두 화평하며 온갖 곡식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를 더 배치해 결사의 본산으로 삼고 법력 있는 승려 일곱 분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게 할 것이다.

이상 승려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의 도내 여덟 고을의 조세로써 네 가지의 일에 들어가는 자금으로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로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정암사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산길.


◆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문왕 폐비의 한

신문왕은 왕위에 올라 1년이 되지 않은 상복을 입고 있는 때에 김흠돌의 반란조짐을 알아채고 일당을 잡아 사형을 집행했다.

반란의 수괴였던 김흠돌의 일족과 동조했던 무리들도 3~4일만에 모두 잡아 처형했다.

김흠돌의 반란을 알면서도 징계하지 않았던 병부령도 그의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그러나 김흠돌의 딸이었던 왕비는 차마 참하지 못하고 궁궐에서 내쫓았다.

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천, 효명 왕자 형제는 곁에 두고 나라의 일을 살피도록 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는 수모를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궁궐의 두 아들이 보고싶어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수모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

폐비는 궁궐에서 손이 닿지 않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군사를 길렀다.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윤홍 장군이 주축이 돼 흩어졌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규합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보천과 효명태자 형제는 신문왕 말기에 훈련을 핑계로 강원도지역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해후했다.

두 태자의 어머니 폐비는 신문왕이 죽기 직전에 먼저 세상을 등졌다.

정암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의 모습.


10년, 20년의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왕이 죽고,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에게서 난 이홍이 효소왕으로 즉위했다.

윤홍 장군은 효소왕이 어렸지만 신문왕이 심어놓은 세력들이 궁궐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어 그들의 힘이 흩어진 702년에 거사를 일으켜 성공했다.

보천은 이미 권력에 욕심을 버리고 불법에 귀화했다. 둘째 효명태자가 궁궐로 입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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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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