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늬로 높새로 마파람으로 갖가지 겉옷 갈아입으며/ 떠나지 않는 그 연둣빛 바람이 당신이었습니까?// 봄의 머리채를 마구잡이로 잡아 흔들고/ 미친 듯 거리를 쏘다니며 소리 지르고/ 긴 작지로 소녀들의 치맛자락을 들치고/ 눈을 뭉쳐내 작은 손톱 밑으로 던져 넣던// 아니 꽃들의 아름다운 씨받이를 돕고/ 분탕을 지긴……/ 때로는/ 울부짖는 폭풍우의 등을 두드리며/ 잠들게 한/ 그 연둣빛 바람이 당신이었습니까?

「대구문학」 (대구문인협회, 2002.1)

연두는 연두(軟豆)다. 연한 콩과 같은 색이 연두색이다. 노란색과 초록색을 섞어놓은 색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말 그대로 정직하게 Yellow Green이다. 흔히 봄철에서 여름 초입에 나뭇가지에서 새로 나는 잎사귀와 대지에서 돋아나는 어린 애순이 연두색이다. 세상의 험한 시련을 겪기 전에 볼 수 있는 순수한 색깔이다. 그래서 연두는 자연의 색깔이고 사람으로 치면 어린이의 색깔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색깔인 까닭에 편안함을 느낀다. 때로는 연초록 또는 라임 그린으로 불리기도 한다.

연둣빛 바람은 순수하고 편안하며 신선한 바람이다. 그래서 연둣빛 바람은 모든 바람의 본 모습이다. 때로는 서쪽에서 불어오고, 혹은 북동쪽에서 넘어오며, 어떨 땐 남쪽에서 올라올 지라도 기실 연둣빛 바람이 옷을 바꿔 입었을 뿐이다. 여정이 바뀌고 동행이 다르다고 본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이 어리석다. 겉옷만 갈아입어도 낯선 이름으로 불리는 현실에서 정체를 통찰하는 시인의 눈썰미가 남다르다.

심술궂고 시샘 많은 꽃샘바람,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변덕스러운 광풍, 치맛자락을 들치고 눈보라를 몰고 다니는 돌개바람 등도 알고 보면 모두 연둣빛 바람이 연출한 둔갑술이다, 꽃가루를 뒤집어쓰고 분탕질하기도 하지만 꽃들에게 중매를 서서 암컷과 수컷을 이어주기도 한다. 결정적인 순간 포효하는 폭풍우를 어르고 잠재우기도 한다. 잔등을 두드리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처럼.

연둣빛 바람의 변신은 감쪽같고 변화무쌍해서 그 정체를 알아채기 결코 쉽지 않다. 사려 깊고 애정이 넘치는가 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철없고 무심하다. 예의바르고 부드러운가 하면 돌연 무례하고 거칠다. 냉혹한 척 사납게 다가오지만 따스한 마음으로 짝짓기를 도와준다. 차가운 바람이 밉지만 기다려지고, 건조한 바람이 싫지만 외면할 수 없다. 연둣빛 바람의 정체와 그 순수한 의미를 믿는다.

하늬바람이든, 높새바람이든, 마파람이든, 아니면 삭풍이든, 그 어느 것이든지 연둣빛 바람이 때와 곳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 것뿐이다. 때론 괴롭고 아프겠지만 자연의 섭리를 알기에 받아들이고 인내할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나무는 갖은 바람에 단련되고 연둣빛은 녹음으로 변한다. 꽃잎이 떨어지고 나면 마침내 열매가 맺힌다.

연둣빛 바람은 자연이고 자연은 곧 조물주이자 신이다. 결국 당신은 자연이고 신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거기엔 당신의 뜻이 담겨있다. 바람의 모습은 때와 곳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당신은 항상 거기에 존재한다. 모두가 자연의 조화이자 신의 뜻이다. 그 연둣빛 바람의 변신은 당신이다. 이제 그 메시지를 깨친다. 세상이 거칠고 험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의미가 드러나리니. 오철환(문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