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잎갈이를 보며/ 정화섭



기지개 켜는 새순 허물 벗어 버린다//온몸을 뒤틀면서 또르르 말린 잎을//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닥에 툭 떨군다//손가락 감아보니 연갈색 밴드 같다//모두의 보호막은 질기고 보드랍고…//숨겨진 끝과 시작이 멀면서도 가깝다

「대구시조 제24호」 (그루, 2020)

정화섭 시인은 2005년 백수전국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먼 날의 무늬’가 있다. 새로운 시도를 다각도로 펼치면서 시조 세계의 음역을 넓히는 일에 주력하는 시인이다.

사람도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빠지기도 하고 미용이나 이발을 통해 머리를 손질한다. 그렇듯 많은 동물은 털갈이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다. 식물의 잎갈이를 유심히 살피노라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기지개 켜는 새순으로 말미암아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을 눈여겨본다. 온몸을 뒤틀면서 또르르 말린 잎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닥에 툭 떨구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시의 화자는 순리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떨어질 때는 일말의 주저함이나 미련도 가지지 않고 단호하게 떨어져 내리는 것을 살피면서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돌아볼 수도 있겠다.

못내 아쉬워서 손가락에 감아보니 연갈색 밴드 같아서 더욱 안쓰럽다. 마음 씀씀이가 다정다감하고 세계를 대하는 자세가 진중하다. 그러면서 모두의 보호막은 질기고 보드라운 것을 떠올린다. 숨겨진 끝과 시작이 멀면서도 가까운 것을 생각하며 잎갈이를 다시 살핀다. 화자는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삶에 대한 어떤 다짐 같은 것을 했을 법하다. 시는 이렇듯 조그마한 현상에서 자연의 이치를 일깨우기도 하고, 그를 통해 정서적으로 치유의 역할도 감당한다. ‘잎갈이를 보며’라는 작품이 그런 점에서 돋보인다. 작은 것을 붙들고 깊이 사유하는 가운데 새로운 시의 길과 결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꽃자리’라는 시조에서 따뜻한 눈길로 생명을 주시한다. 버려진 타이어 속에 새들이 집을 지은 것을 보고 얼기설기 물어다 놓은 경계 너머의 것들을 생각하면서 생명을 보듬어 안고 시간을 한껏 늘리는 것을 어여삐 바라본다. 화자는 무심히 읽어버린 그들의 이야기가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의 심연처럼 불면의 얇은 막 안에 빛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을 눈여겨본다. 그를 통해 뿌듯한 마음을 가진다. 발가벗은 우주가 주위를 감싸 안을 때 여기가 꽃자리라면서 달콤하게 속삭이듯 삶과 꿈이 뒤엉킨 채로 아기 새가 눈을 뜨는 것을 본다. 사람살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따뜻한 성정의 시인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아와 세계를 관조하면서 얻은 시편들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시가 결코 멀리 있는 신기루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와 더불어 사는 일은 곧 우리의 품격을 높이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내가 쓴 한 편의 시가 누군가의 가슴을 적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골방에 들어앉아 펜을 달구고 있는 것은 아닐 터다. 쓰는 그 자체가 행복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은 오늘도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 부단한 탐색과 궁구 중에 불후의 명작은 탄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늘 혼신의 힘을 다한다.

이제 11월도 막바지다. 언제 강추위가 몰려올지 모른다. 따뜻한 아랫목을 찾게 되는 계절이다. 산과 들이 무채색으로 드리워진 만큼 알록달록 갖가지 색채로 내면을 물들여 우울한 정서를 일거에 걷어내어야 할 것이다. 윤택한 삶은 독서에서 비롯되고 좋은 시들은 역동적인 견인차가 될 수 있기에 시를 흥얼거리며 겨울을 즐겁게 맞을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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