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을 끌어오던 영남 유림의 위패 서열 갈등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케케묵은 자존심 싸움을 끝내고 지역 유림의 화합했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손들이 갈등의 단초가 됐던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서열을 정리하고 화해의 손을 맞잡은 것이다. 오랜 유림의 지역 갈등이 치유됨으로써 지역 발전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경북도는 지난 20일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국학진흥원에서 호계서원(虎溪書院) 복설 고유제를 열었다. 이날 고유제에서는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좌 배향, 학봉 김성일과 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우 배향에 함께 모셨다.

병호시비는 162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다툼을 벌이며 지속됐으나 이날 행사로 영남 유림의 학맥 간 오랜 갈등을 비로소 봉합했다. 병호시비는 지역 유림의 해묵은 숙제였다.

병호시비란 1620년 퇴계 선생을 모신 여강서원(뒤에 호계서원으로 개칭)에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위패를 상석인 퇴계의 좌측에 둘 것이냐를 두고 시작된 논쟁이다.

당시 벼슬의 높낮이로 정하기로 해 영의정을 지낸 서애가 좌 배향이 됐다. 학봉의 후진들은 스승이 서애보다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나다며 반발했으나 세력이 약해 따라야 했다.

1805년 또다시 서애와 학봉 간 서열 문제가 불거졌다. 1812년 3차 논쟁이 벌어지자 서애 제자들은 호계서원과 결별,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위패를 봉안했다. 이후 안동 유림은 학봉(호계서원)과 서애(병산서원)파로 갈라졌다. 이를 병호시비라 칭했다.

400년 논쟁은 2013년 퇴계를 중심으로 좌측에 서애, 우측에는 학봉과 대산의 위패를 함께 모시는 것으로 양 유림이 합의,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호계서원을 이전, 복원하면서 유림의 서열 싸움을 끝내게 된 것이다.

영남의 대표적인 양 학맥의 후진들이 선배들의 자존심 싸움을 끝낸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 갖고 그만큼 오래 다퉜냐고 하겠지만 당시 명분을 중시하던 학자들 간에는 서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젠 시대가 변해 서열 다툼의 의미는 없어졌다. 조선시대 당파싸움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지역에서 양대 학맥 간 갈등은 적잖은 후유증도 가져왔다.

병호시비의 종식은 갈등을 빚던 영남 유림의 양대 학맥이 화해를 통해 이뤄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화합, 존중, 상생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경북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상생과 화해의 정신이 지역에 두루 미치길 바란다.



홍석봉 기자 dghong@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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