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88)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 터에서 발견한 국보 2점 미륵불과 아미타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감산사 대적광전 뒤뜰에 문화재자료 제9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2층과 3층 몸돌 없이 옥개석을 포개어두고 있다.


감산사는 경주시가지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로 30여 분 달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원성왕릉의 동북쪽 1㎞ 정도 가깝게 연접해 있다.

왕족이 부모님을 비롯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719년에 세운 절이다.

특히 이 절터에서 발견된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뒷면에 불상과 절을 지은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조성연도를 기록한 유일한 불상으로 예술적 작품성이 뛰어나며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고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 감산사 대적광전에는 훼손된 모습을 복원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협시불도 없이 혼자 앉아 있다.

대적광전 뒤뜰에는 2층과 3층의 몸돌이 사라진 신라시대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왕실의 복을 빌었던 존엄을 고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경주시가지에서 울산 방향으로 7번 국도를 이용해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감산사 대적광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본존불로 안치하고 있다. 원성왕릉과 가깝게 연접해 있다.


◆삼국유사: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의 주 부처인 미륵존상의 화광 후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개원 7년 기미(719) 2월15일에 벼슬이 중아찬인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해 공경스런 마음으로 감산사 절 한 채와 석미륵 하나를 만들었다.

아울러 개원이찬과 아우 양성소사와 현도법사와 누이 고파리, 전처 고로리와 후처 아호리 및 서형 급한일길찬과 일당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리 등을 위해 좋은 일에 앞장섰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

감산사지 삼층석탑의 옥개석은 끝부분을 날아가는 새의 날개처럼 날렵하게 위로 치켜세우고 있다. 옥개석 아래쪽에 물이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돌홈을 새겨 특이하다.


미타불의 광배 뒷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사봉어와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면서 나라의 주인인 대왕과 이찬 개원,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인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아우, 소사 양성, 사문 현도, 죽은 처 고로리, 죽은 누이 고파리, 그리고 처 아호리 등을 위하여 감산의 농장을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

또 돌로써 미타상 하나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을 위해 받들어 모셨다.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

임금의 계보를 보면 김개원은 바로 태종 김춘추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이니 곧 문희가 낳았다.

김지전은 인장일길찬의 아들이다. 동해흔지는 아마 법민을 동해에 장사 지냈다는 말인 듯하다.

신라시대 중아찬 김지성이 감산사를 창건하고 어머니를 위해 조성한 석조미륵보살입상. 국보 제81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감산사 대적광전 벽면에 붙어있는 사진.


◆감산사의 보물

감산사에서 국보 2점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가 출토됐다.

일제강점기에 미륵불과 미타불은 원형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국보로 지정 전시하고 있다.

또 대적광전에 안치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좌상과 몸돌을 포함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복원된 삼층석탑도 지역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전체 높이가 2.52m로, 상당히 이국적인 풍모를 지녔다.

살짝 비튼 몸, 화려한 장엄, 길게 드리워진 영락 장식, 몸에 밀착된 군의(치마) 등은 불상에서 처음 나타나는 표현들로 이색적이다.

불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

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신라시대 중아찬 김지성이 죽은 아버지를 위해 조성한 석조아미타불입상. 국보 제82호로 지정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감산사 대적광전 벽면에 붙어있는 사진.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 모양이다.

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성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 코, 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 U자형의 옷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감산사 대적광전에 안치하고 있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318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머리부분과 손 부분이 파괴돼 보수 복원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 있게 보이게 한다.

불상의 몸체 뒤의 광배는 배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무늬를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미륵불과 같이 맨 아래는 8각이고,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손꼽힌다.

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감산사지 삼층석탑은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절터 동쪽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2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이 얹힌 전형적인 신라후기 석탑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던 것을 196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1층 탑신은 약간의 부분 파손이 있고 2층과 3층 탑신은 없어 옥개석이 포개어진 채 복원됐다.

탑 옥개석은 4단 받침이며 추녀가 살짝 들려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다.

탑 꼭대기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있다.

옥개석 아래 부분에 홈을 파 물 흐름을 방지하는 형식이 특이하다.

감산사 대적광전에 안치돼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북지방유형문화재 318호 지정 관리되고 있다.

협시불도 없이 혼자 불단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라 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약 1m,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평화로운 얼굴 표정이다. 눈과 코, 입, 머리, 육계가 제대로 남아 있다.

머리는 깨졌던 것을 다시 복원했고 광배와 대좌는 새로 만들어 고색의 향기가 묻어나는 석불과는 다소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데 근래 보수한 것이다.

현재 비로자나불 중에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을 연구하는데 중요자료가 된다.

등 뒤로 아미타불탱화가 빛깔 곱게 채색돼 있다.

현재 감산사 부근에는 신라시대 석재들이 많이 드러나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감산사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외교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는 능력도 탁월했다.

김춘추는 전쟁터에서 김유신과 함께 하면서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무력행사는 김유신을 앞세워 대부분 이기는 전투를 했다.

김춘추는 승리한 전쟁터에서 가끔 우연처럼 여인을 취하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전생의 인연인 듯 딸과 사위를 잃은 전쟁터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아들을 뒀다.

김춘추는 끝내 이 부인과 아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음지에서 돌보며 지원했다.

그 아들의 이름이 김지성이다.

때로는 김지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근골이 아비를 닮아 훤칠하게 빼어나 준수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이 때문에 김춘추는 더욱 그를 숨겨 키워야 했다. 부인들과 다른 아들들의 시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김지전은 어려서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김춘추가 그의 어머니에게 당부한 탓에 신분을 모르고 자랐다.

지전은 왕이었던 아비 김춘추가 죽은 이후에야 어머니로부터 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감산사 앞에 연못을 조성돼 있다. 연못 주변 조경석도 신라시대 석재로 보이는 돌이 많다.


지전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무술 실력으로 상당한 지위까지 올라 나라의 일을 보는 신하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67세가 되던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불교에 심취하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그렇지만 인연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절을 짓고,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아름다운 솜씨로 빚어 불전에 모시고 후손들이 길이 명복을 빌게 하는 터를 마련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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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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