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옥상
▲ 조옥상
천년사찰 희방사를 감싸고 흘러가는 숲이 울울창창하다. 소백산 아래 고즈넉한 희방사! 불자들이 삼삼오오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이 해사한 잎을 흔든다. 흐르는 계곡물은 감로수처럼 신령스럽다. 숲 향기가 훅 풍기자 맹맹했던 코가 뻥 뚫린다.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 향기가 숲 향기라 한다. 거대한 소백산 숲 향기에 온몸이 경쾌해진다. 희방사로 오르는 길에서 얻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아 가슴 또한 설렌다. 자연은 늘 그러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좋다. 서로를 조화롭게 보안하는 자연이라는 웅장한 이치가 길을 나선 나그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들꽃 소소한 이 길은 생경하지 않다. 희방사에서 십 리쯤 떨어진 풍기에서 유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신작로에 수없이 박혀있던 돌부리는 다 어디로 가 뒹구는지, 잘 닦아진 길에서 새삼 격세지감을 느낀다. 청아한 매미소리와 거대한 숲이 바투 다가온 걸 보니 희방폭포가 눈앞에 펼쳐질 모양이다. 매표소를 지나 폭포에 다다랐다. 수십 년의 풍화작용에도 청청한 위상이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은빛 포말에 우중충하게 뒤집어쓴 세상 먼지를 씻고 가파른 철제계단을 오른다. 너럭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모진 풍상에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바위에 앉아 이끼 낀 추억 한 자락을 꺼낸다.

희방사 마당으로 들어섰다. 천년 역사의 숨소리가 마치 지나간 어제 같다. 댕그렁! 정연한 기와비늘을 떨며 산사 처마에 달린 풍경이 운다. 허공의 뜰을 깨우는 저 풍경은 얼마나 많은 날을 쇠줄에 묶인 채 견뎌 왔을까. 저리 맑은소리는 어떠한 성불로 하여 얻어진 공명일까.

아버지는 몸이 허약하셨다. 희방사에서 두 해쯤인가 요양을 하셨다. 국가고시를 준비하시던 중 지병이 도진 것이다. 가족을 두고 깊은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셨던 아버지, 장녀인 나는 초등학생이었지만 동생들은 어리광부리는 나이였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조르면 엄마는 우리를 깔밋하게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 희방사로 향했다. 완행열차만 쉬어가는 역사를 지나, 개망초 흐드러진 비포장을 폴짝거리다 엎어지면 무릎에서 피가 흘렀다. 잠시 쉬어가는 그 옆으로 산수국이 구슬처럼 피어 있었다. 잉크색 꽃을 탐스럽게 피운 산수국은 아버지의 얼굴처럼 환했다.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시는 아버지는 여름이면 다래를 따서 쌀 속에 묻어두었다가 꺼내주셨다. 말랑해진 다래는 달콤하고 맛있었다.

숲속으로 달아나는 조릿대 바람을 붙들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서성인다. 대웅전 옆이었던가, 지장전 앞이었던가, 아버지의 방 띠살문은 보이지 않고, 돌과 나무와 꽃과 새들이 조화로운 화음을 주고받을 뿐이다. 텅 비어서 다시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낙심천만에서 오는 실망의 간극에는 어떠한 값이 주어질까.

초등학교 사학년 가을소풍이었다. 소풍 장소는 희방사! 고민에 빠졌다. 폭포 위 너럭바위에 오르면 희방사가 보이고 그 사찰 오두막에는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그곳에 와 계시는 수척해진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소풍날 아침 엄마는 분주하지 않았다. 김밥을 말고 계셨지만 맛있는 냄새도 나지 않았고 선생님께 드릴 김밥은커녕 과자도 사과도 들어있지 않았다. 선생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찐빵 반죽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바위 모퉁이에 숨어 김밥 서너 개만 먹고 집결 장소로 내려왔다. 특기 자랑이 시작되는 동안 아버지는 말랑해진 다래를 주시려고 당신 딸을 찾으셨던 것 같다. 발칙하게 간과했던 철없는 행동에서 오래도록 자유롭지 못했다. 부모님께선 소풍날에 대하여 일절 묻지 않고 빙그레 웃어넘기셨다. 그날 이후 다래는 맛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입에 대지 않았다. 요즘에도 서양 다래라는 키위를 보면 딸을 찾다가 쓸쓸히 돌아서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른거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동종소리 은은한 희방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두운조사가 창건설화*에 기인하여 세웠다는 수수한 사찰이다.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지만 천년고찰의 고아한 향기를 품고 있다. 내 선친에게 무량한 자비를 베풀어준 희방사! 건강을 되찾으신 아버지는 국가고시도 합격하는 영광을 얻으셔서 우리 가족은 별 굴곡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종심이 된 이쯤 이승을 떠나시던 선친의 세수가 되어서야 참회의 서를 써 내려가는 심정으로 희방사를 찾았다. 산허리를 휘감은 운무 따라 아버지의 흔적도 흘러갔지만 애잔한 그림자 하나 어릿어릿 얼비쳐온다. 수그러진 고개를 들어 평화로이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닦는다.

*창건주인 두운조사가 소백산 연화봉 중턱 동굴 속에서 겨울철에 수도할 때 찾아온 호랑이의 목에 박힌 비녀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은혜를 갚고자 처녀를 물어다 놓는다. 처녀는 지금의 경주 유석의 무남독녀다. 두운은 동굴 속에 싸리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따로 거처하며 봄에 집으로 데려가니 유호장은 은혜를 보답하고자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해주고 무쇠로 수철교를 놓아주며 절 이름을 희방사라 하였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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