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희

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

천연색으로 가을이 깊어간다. 누렇게 익어가는 알곡 가득한 들판과 그 언저리에서 수문장처럼 흔들리는 하얀 억새꽃이 마음을 풍요하게 한다. 단풍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늘 즐거운 날이 되기를 응원하는 것 같다.

제법 쌀쌀해진 아침 공기지만 창을 열어 깊은숨을 들이켜 가을의 향내를 맡는다. 이제 코로나 발생 건수도 지역에서는 훨씬 줄어들었다. 그러자 하나둘 모임을 시작한다는 연락이 온다. 출판기념식 행사를 회장댁에서 열기로 했다는 문학동아리 소식이 왔다. 회장님은 집을 내시고, 참석자를 위해 운전사를 자처하는 분도 있고, 일찍 만나 팔공산 순환도로 단풍을 먼저 구경하고 저녁에 기념식에 참석하자는 제안도 있어 마음이 들뜬다. 총무 고생한다며 인도 카레 음식점에서 미리 점심 대접을 하고 싶다던 친구는 선뜻 답을 하지 않자 ‘필참’이라는 별 문자를 보낸다. 가을은 소소하게 또 한껏 풍성하게 사람의 마음을 많이도 들뜨게 하나 보다.

입원한 코로나 환자를 생각하다 보면 아직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늘 가득하다. 환자를 진료하면서도 열이 있거나 호흡기 감염 증세가 있으면 부쩍 긴장하게 되니 말이다. 의심되면 빨리 취합 검사하고 또 입원해서 그 결과를 알아본 후에 일반 병실로 옮겨 치료하면 되는 체계가 마련돼 있으니 그나마 안심은 되는 상황이다.

창틀에 있던 시클라멘이 빨갛게 꽃을 피웠다. 코로나가 한창 지역을 휩쓸고 있던 봄에 입원해 거의 한 달 병실 생활을 했던 이가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서 주고 갔던 화분이다. 언제 꽃이 피어나기는 할 것인가? 반신반의하면서 창가에 두고 조금씩 물만 주었었다. 그 꽃이 보란 듯이 질긴 생명력을 이어 살아나 가을이 되자 꽃을 활짝 피운 것이다. 시클라멘의 꽃말은 수줍은 사랑이라던가. 내성적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꽃, 시클라멘이 오늘은 새삼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모습이 병실에서 오래 조용하게 인내하며 치료받던 그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마음이 짠해진다. 그 환자가 좋아한다던 꽃,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해서 꽃이 활짝 피더라도 꽃잎이 아래로 향해서 피어 있어 좋다고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어쩌면 그가 좋아하는 이유는 잎에도 대리석 무늬와 같은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 있어서 더 든든해 보여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시클라멘 꽃을 보니 언젠가 들었던 전설이 떠오른다. 수도에만 전념하며 수녀님이 되고자 했던 이가 오랫동안 함께 있던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 사랑을 알게 되자 종교에 귀의하고자 행하는 수도 생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종교를 뿌리치고 결국은 그 남자와 살기로 하고 도피를 했다. 사랑은 잘 이뤄지지 않았고 심적인 갈등만 겪다가 결국 세상을 하직하기로 했다. 그때 피를 흘린 수도녀의 넋이 시클라멘이 됐다는 이야기. 꽃이 빨간 것은 슬픔이 칼처럼 꽃의 심장을 찔렀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프게 느껴졌었다. 화려하고 예쁜 색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시클라멘 꽃, 꽃말과 전설이 코로나를 힘들게 이기고 오늘도 소문 없는 생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다던 그 환자와 겹쳐 더욱 나의 눈길을 끈다. 꽃 선물할 때면 이제부터는 시클라멘이 제격일 것 같다. 코로나의 거리 두기가 조금은 완화됐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조심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라 수줍은 사랑을 지켜야 하기에. 겨울철에도 활짝 피어있는 꽃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이면 서로 생각하는 이에게 시클라멘 꽃을 선물하면 올해는 더욱더 좋지 않을까 싶다.

해마다 이맘때면 창으로 비켜 드는 햇살로 벽에 무지개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파서 병원에 온 아이들은 그 무지개를 보면 발로 밟아보기도 하고 손으로 움켜잡아 보기도 한다. 그렇게 몰입해 무지개를 다루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행복과 불행은 당사자의 선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 문득 김수환 추기경님 말씀이 떠오른다.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중략…//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뿐이라오.’

삶이란 어쩌면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아니겠는가. 순간순간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리며 하루를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으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수 있기를.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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