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자 김미향
▲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상자 김미향
하늘이 몸을 연다. 주산이 붉은 눈을 뜬다. 크고 작은 무덤들이 섬처럼 떠 있는 산등성이에도 햇발이 비친다. 시공간을 넘어 천년을 오갈 수 있는 길, 왕릉 길 문턱을 조심스레 넘어선다. 과거를 잇는 탯줄 같은 좁은 길이 산잔등까지 이어진다. 낯익은 듯 낯선 땅. 태고의 숨소리로 가득한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잿빛으로 박제된 옛 도시 곁에서 흐르고 있는 오늘의 풍경이 기묘하다.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길에서 문득 현실로 돌아오는 데는 길 중간중간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볼 때다. 천오백 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씻기고 깎이면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무덤은 단순한 비경이 아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였다. 이채로운 전경 속에 다채로운 삶이 널려 있는 곳, 양옆의 떼무덤을 뒤로하며 대가야 속으로 들어간다. 내 안에서도 지난날이 도도록하게 올라온다.

봉긋하니 솟은 뒷산의 무덤은 철부지들의 놀이터였다. 솔가리를 긁어모으고 솔방울을 줍다 꾀가 나면 우리는 갈퀴와 포대 자루를 밀쳐놓고 다람쥐처럼 미뽈을 오르내렸다. 배고프면 삶은 고구마를 먹었고 묏등에 앉아 삘기도 질겅거렸다. 무덤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노느라 땔거리를 주워오라는 어머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크고 나서야 그곳이 문중 산이고 문중 어르신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눈앞에 놓인 이 무덤이 개구짓하며 놀던 그 묘지의 확대판 같다.

가슴으로 들어온 풍경이 무시로 말을 건넨다.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까마득한 옛 시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며 산길을 오른다. 숨이 차오를 즈음 능선을 뚫고 솟구친 소나무 앞에 도착했다. 늠름하다. 철갑을 두른 호위무사 같다. 그 뒤로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 최고 순장 무덤인 지산리 제44호분이 주산의 심장부를 타고 앉아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의 땅처럼 순수한 비경에 매료된다.

첫 대면이다. 온몸의 신경이 깨어나 대가야의 숨결을 마주한다. 대체 고요한 이 땅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속이 궁금했지만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은 무덤 속으로 스며들어 여기저기 둘러본다. 진짜 속살이 궁금해졌다. 천년의 시간이 불룩하게 쌓여 있는 고분에 인사를 건네며 돌아선다. 들꽃이 무덤가에 하얀 불을 밝혔다. 가야인들에겐 죽음으로 기억되는 자리지만 꽃엔 생명의 터전이다. 사멸의 땅에도 꽃이 피어났다. 뛰는 맥박을 느끼며 대가야 왕릉 전시관으로 걸음을 내밟는다.

지산리 고분군 제44호.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해 놓았다. 마치 저승 궁궐 같았다. 왕의 자리인 으뜸 돌방이 가운데 있고 그 주변으로 2기의 딸린 돌방과 32기의 순장덧널이 있었다. 무덤의 주인은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를 비롯해 시녀, 마부, 농부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왕이 죽으면 그와 같이한 사십여 명의 백성, 어린이도 예외 없이 묻는 순장 제도가 참 불가사의했다.

마음이 뒤숭숭하다. 왕을 위한 삶이 죽음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산목숨을 생다지로 내놓아야 하는 민초들의 생을 생각하면 순장 풍습이 봉인된 제44호 고분군을 어찌 위대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주군이 딛는 걸음이 곧 길이 된 세상. 겉보기엔 웅장했으나 그 속엔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묻혀 있었다. 서민의 공포가 배어 있는 제44호분은 소리 없는 절규였다.

순장 묘를 몇 번이나 에돈다. 맴돌 때마다 이웃 같은 익숙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리따운 시녀와 믿음직한 호위무사, 두려움에 질렸을 앳된 소녀와 다정한 부부의 겁먹은 표정이 스쳐 간다. 어떤 종말인들 슬프지 않을까.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마지막 순간을 대면해야 하는 필연적 숙명 앞에 우리는 모두 한몸일 뿐이다. 무서운 죽음 앞에서의 몸짓을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 하지만 어쩌랴. 이 또한 지나간 역사인 것을.

그들은 사라지고 이제 흔적만 뚜렷이 남아 있다. 울부짖었던 자리는 보고 느끼는 전시 공간이 되어 후세대를 불러들인다. 죽음으로써 끝이 아니라 후대들과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비상을 꿈꾼다. 뭔가를 지킨다는 건 그것이 존재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것. 본래 것을 해치지 않고 재창조한 전시관은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세월 속으로 사라질 뻔한 가야국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고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환상 같은 이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훗날, 이 순간도 역사의 한 부분이 되리라.

대가야 고분의 내부를 엿보았다. 잔인했지만 지나온 것 또한 발자취라 생각하니 소란하던 마음이 조금은 고요해진다. 천오백 년 전 또래가 입었을 평상복을 가상으로 착용하며 가야 여인이 되어본다. 이야기를 쫓다 보니 알게 되었다. 지체 높은 귀족의 야심도 이름 없는 하인들의 목숨도 값진 역사라는 것을 말이다. 고대 도시는 이제 풍경으로 흐른다. 깊게 잠들어 있는 태고의 시간에 또 하루의 겹이 쌓여 풍광을 만든다.

천년의 시간을 가까이서 만난다는 건 행운이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물음표투성이일 때 한 번쯤 들러 그들의 문화를 접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실물 크기의 묘제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함께 묻은 물건들이 문화가 되어 숨을 쉬고 있다. 많은 돌무덤은 옛 가야인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타임캡슐이자 멀고 먼 과거로의 여행을 도와주는 타임머신이었다.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은 이제 우리의 보물이 되었다. 책 속이 아니라 오늘의 이 작은 도시 고령에 온전히 살아 숨 쉰다. 가야의 모습을 복원해 나가면서 이천 년 역사의 도시로 거듭나는 이곳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한 권의 역사책이다. 페이지마다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걸음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펼쳐본 책장엔 바람의 걸음보다 사람의 발길이 더 오갔으면 한다.

태양의 기운이 주산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저 산천초목들도 대가야의 흥망을 지켜보며 웃고 울었으리라. 가지를 늘어뜨린 늙은 나무들이 굽었으되 꺾이지 않은 대가야를 닮았다. 바람결에도 고대국가의 향기가 묻어나는 듯하다. 여기에서는 햇빛도 역사의 빛이고 바람도 역사가 담긴 바람이었다. 능선에 솟은 봉분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돌아선다.

* 미뽈: 묘의 봉우리(경상도 사투리)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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