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수상자 고마리
▲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수상자 고마리
물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마을. 내성천이 삼면을 휘감고 도는 물도리동 마을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무섬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그제야 사람들이 발붙이고 사는 곳이란 현실감이 온다.

마을에는 반가의 기품이 흐르는 고택이 여러 채 있다. 세월의 화살을 비켜간 듯 정정한 집들은 그 후손이 거주하는 곳도 있다.

내 발길은 마을의 한 집 앞에서 멈췄다. 만죽재 고택 바로 옆의 김덕진 가옥이다. 성채처럼 견고해 보이는‘ㅁ’자형 본채와 작은 방앗간채가 어깨를 맞대고 있는 구조다. 남정네들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인들의 거소인 안채가 한 몸처럼 붙어있는 게 독특했다.

규방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현대식으로 개조한 탓에 고졸한 맛은 덜하다. 하지만 거처하는 사람의 불편을 담보로 하는 고택 보존은 좀 이기적인 데가 있다. 큰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개조를 허용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부엌 뒤편에 숨기듯 자리한 아담한 방이 보인다. 가까이 갔다. 여인들은 이곳에서 바느질이며 마름질을 했을 것이다. 긴 노동의 시간을 달랠 노래와 이바구도 필요했을 것이다. 알음알음으로 규방의 언어인 한글도 익혔다. 사대부에게 멸시받던 한글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네들은 고달픈 일상사를 글로 짓고 읊조리며 위안을 삼았다. 작은 방에서 먼 옛날 여인들 가사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덴동어매하고 동네 여자들하고 봄에 화전놀이를 가그덩, 가가 잘 노는데 똑 내겉이 시집와가 이레 만에 천청상이 되뿐 색씨 하나가 한탄을 해 가매 우는 게라’ 요즘 말로 바꾸면 이렇다. ‘덴동어미하고 동네 여자들이 봄에 화전놀이를 가거든. 덴동어미가 참 잘 놀지. 그런데 꼭 나처럼 시집와서 일주일 만에 남편 잃고 과부가 된 색시 하나가 한탄을 하며 우는 게야.’

세 번 개가해 네 명의 남편을 모두 잃은 덴동어미가 동네 여자들과 화전놀이를 가서 불렀다는 ‘덴동어매화전가’다. 주거니 받거니 울다 웃다 흐벅지게 불렀을 내방가사를 이 지방 여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나는 댓돌에 앉아 환청인 듯 들려오는 화전가를 지그시 눈 감고 듣는다. 첫 남편은 그네 타다 죽고 두 번째는 괴질에, 세 번째는 익사하고 마지막 낭군은 불에 타 죽었다는 억세게 재수 없는 여자 덴동어미. 운명의 비정함에 굴하지 않고 활달한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이 노래는 조선 여인들의 굴곡진 삶을 해학과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뒤란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줌에도 여인들의 희로애락이 묻어온다. 고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바람이 일더니 갑자기 작달비가 내리친다. 처마 밑으로 화들짝 피했다. 뿌연 빗줄기 속, 삼 년 전 세상을 뜬 작은어머니의 일생이 문득, 덴동어매화전가에 오버랩 됐다.

섬마을 큰애기였던 작은어머니는 열일곱에 동네 언청이 총각에게 팔리듯 시집갔다고 한다. 마음 맞춰 살다 보니 아이도 생기고 살림도 늘었는데 새우잡이 나갔던 낭군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친정에 맡기고 등 떠밀려 재가를 했다. 야속하게도 나이 차 많았던 남편이 폐병으로 먼저 가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팔자 더러운 년이라 손가락질했다. 친정 옆 동네에서 새우젓 장사를 열어 억척스레 살았는데 우리 작은아버지와 눈이 맞아버렸다. 다시는 재가하지 않겠다고 머리털을 움켜쥐며 맹세했지만, 사람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세 번째 신랑이랑 재미나게 사는데 그동안 설움을 모두 갚고도 남을 만큼 행복했다. 천성이 다정했던 작은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애기라고 부르며 업어주고 예뻐했다. 그런 통에 어린 내게 부끄러운 장면을 몇 번이나 들키기도 했다. 하지만 덴동어미보다 생의 결이 고왔던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작은아버지가 건설 현장에서 낙상 사고를 당했다. 시멘트를 들고 비계를 오르다 추락했다. 작은아버지는 오래도록 병상에 있었다. 입술이 허옇게 부르튼 작은어머니는 혼잣말로 입술을 달싹이곤 했다. 처음엔 넋두리라고 지나쳤는데 어느 날 잠든 작은아버지 곁에서 흐느끼듯 읊조리는 노래를 들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마냥 슬픈 느낌은 아니었다. 애이불비의 정서가 덴동어미와 작은어머니를 연결하고 있었다.

비 그친 마당을 나서 외나무다리로 갔다. 세상엔 얼마나 많은 덴동어미들과 화전가가 있을까. 깊은 규방에 갇혀 삼종지도를 강요받았던 여인들은 또 다른 덴동어미였을 것이다.

무섬마을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마저 사친의 정을 사무치게 했을 것이다. 예전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였던 외나무다리는 길이가 150m에 폭은 30cm에 불과하다. 길고 가늘게 설움을 삭혀야 했던 여인들의 심중을 보는 것 같다.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 채 건너야 했던 것처럼 여인들은 서로를 부축하고 지지했을 것이다. 나는 양팔을 벌려 중심을 잡으며 걸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을 말갛게 흐르는 강물이 보듬어 주는 것 같았다. 오뚝이 같은 여인들은 끝내 이 다리를 건너 어머니를 만나고 말았으리라. 누구나의 가슴마다 애이불비의 화전가는 불려지고 흘러나갔을 것이다.

멀리 비단처럼 휘감아 도는 내성천이 보이고 강 따라 펼쳐진 은모래 백사장이 반짝인다. 바닷가 백사장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넓이와 기세다. 자기 삶 앞에 당당했던 덴동어미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다. 다리를 되돌아와 마을 한가운데로 갔다. 만운고택이 있다. 시인 조지훈의 처가라고 한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외씨버선처럼 뽑아낸 시인의 처가답게 운치 있다. 지훈의 시비도 보인다. 무섬마을의 절경을 노래한 ‘별리(別離)’라는 시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이 땅에 살다 간 수많은 덴동어미의 넋을 위로하는 걸까. 이어지는 촉촉한 시어에 마음이 아릿하게 스며든다. 어느새 구름 걷히고 햇빛이 쨍하게 비석을 비춘다. 가라앉았던 마음도 햇살처럼 튀어 오른다. 스마트폰으로 화전가를 검색했다.

‘이내 수심 풀어내어 이리저리 부쳐보세

천만 첩이나 쌓인 설움 웃음 끝에 하나 없네 ’

아픔마저 꽃전으로 부쳐 내던 덴동어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무섬마을에 가득하다. 개가를 포기한 청상은 어떻게 살았을까. 씩씩한 화전가를 만들어 굽이굽이 불렀을까. 수도교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린다. 무섬마을이 실타래처럼 오래 풀리고 있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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