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기다림과 죄책감은 누구의 것인가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전쟁과 혁명은 언제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낳지만 그 이야기들이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그저 이야기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의 뒤안길에서 자기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정작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삶이 곧 우리의 삶이기도 해서는 아닐까.

누군가는 대의를 위한 전쟁을 불사하자고 말하고, 누군가는 세상을 뒤엎을 혁명을 꿈꾸지만 나는 오늘과 다름없는 내일을 꿈꿀 뿐이다. 전쟁과 혁명으로 내가 얻을 것은 없지만 잃을 것은 많다. 그래서 큰 별 일이 없으면 내일도 오늘과 다름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부정되고 새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혁명일진대 문화대혁명으로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이 문화대혁명때 교수였던 루옌스는 유형지로 끌려가고, 펑완위는 남아 딸을 키운다. 춤을 추던 딸은 반동분자를 아버지로 둔 이유로 공연의 주역에서 탈락하는데 어느날 류옌스가 집으로 찾아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펑은 두려움 때문에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루옌스는 문 틈으로 쪽지를 하나 남긴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날, 딸의 고발로 루옌스는 잡혀가고 펑은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후 펑은 그날 루옌스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문을 열어두고 살게 되지만 정작 옌스가 돌아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옌스는 펑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편지를 보낸다. 5일에 돌아온다는. 그리고 옌스는 5일에 기차역에서 돌아오는 흉내를 내지만 정작 펑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날마다 옌스를 기다리는 팻말을 든채 역으로 나간다. 펑에게는 매일이 5일인 것이다. 펑의 모든 기억과 삶은 5일에 멈추어 버렸다.

펑 역을 맡은 공리와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유명한 장예모 감독이 함께 만든 이 영화는 가족과 사랑에 대한 짙은 멜로 드라마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기다리지만 정작 그들을 그런 불행으로 끌고 간 것은 혁명이다. 수십년은 기다린 남편이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는 옌스의 기다림은 가슴 아프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매일이 5일이고, 그래서 매일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역으로 가는 아내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그녀를 돌보는 한 남자의 삶도 참담하다.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들은 진정 자신의 소시민적 삶이 희생되더라도 정치적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단언코 그럴 생각이 없다. 혁명은 그들의 일이고 삶은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언제 소시민들이 혁명의 주역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 영화는 가족과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들이 있어 세상은 빛나지 않겠는가.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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