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21세기의 유래 없는 세계적 역병인 코로나19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전 팬데믹 사례로 꼽히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로 인한 세계적 사망자 수가 수십만 명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아직도 백신 개발에 대한 희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 볼 때 장기간 계속 될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중국의 인위적인 바이러스 유출을 의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후 이러한 위기는 상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전염병 최고 경보단계인 ‘팬데믹(Pandemic)’을 애써 우리말로 표현하면 ‘대창궐’을 의미한다. 단순히 한 지역 한 나라만을 봉쇄해서 해결되지 않는 국제적 붕괴를 불러 올 대재앙인 것이다.

한때 국가수반인 대통령을 비롯해 행정부와 집권 여당은 이른 시기에 코로나를 극복할 것이라고 장밋빛 낙관을 내놓았다. 코로나로 인한 첫 사망자가 나온 날에도 ‘짜파구리’로 오찬을 즐기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K-방역이라고 자화자찬하며 긍정적 평가의 몇몇 외국 언론기사를 연일 정권 홍보용으로 사용했다. 국내 경기 회복과 내수 진작이라는 명분하에 임시공휴일을 지정하고 소비를 위해 가족단위 외식을 장려하기도 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빠른 검사와 검사 인원수라고 공개 발표하기도 했다. 의료진을 뒤로하고 현 정부의 발 빠른 대처와 위기대응 능력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위대한 K-방역에 대한 하늘의 시샘과 분노였던 것일까. 코로나19라는 역병은 ‘신천지 코로나’와 ‘대구 코로나’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클럽 코로나’와 ‘방문판매 코로나’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광화문 코로나’는 결국 적지 않은 수의 시위 주동자를 구속하는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예방책은 어느 새 숫자가 붙기 시작하더니 2.5단계니 3단계니 하는 애매한 기준의 블랙홀로 빠져 들고 있다. 하물며 국가적 명절인 추석마저 귀성을 자제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더욱 웃픈 사실은 개천절에 진행된 반정부 ‘드라이브 스루’ 시위에 대한 원천 봉쇄와 교통방해를 근거로 면허취소와 실정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발상은 엄포를 넘어 협박처럼 들렸다. 정지된 집회의 형태가 아니라 이동하는 차량을 이용한 반정부 표명이 과연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등극할지가 무척 흥미롭다. 코로나19에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정부와 집권 여당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오직 역병의 ‘이름 붙이기 놀이’에 치중하는 듯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흔히 사전적 의미로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염치라 부른다. 남에게 신세를 지거나 폐를 끼칠 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자세는 우리네 선조들의 선비정신과 맞닿아 있다. 선비가 자신의 영달과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겼고, 이러한 생각이 사회 저변에 확산하여 일반 백성도 ‘염치없는 놈’이란 말을 최악의 욕으로 여겼다.

시대가 바뀌었음인가! 코로나 시대에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비말로 전염되는 코로나인 탓으로 공중장소에서 마스크를 내린 사람이 그러하다. 아예 마스크를 끼지 않은 인간 군상들은 염치가 뭔지도 아예 모른다. 하긴 코로나라는 바이러스 또한 눈과 귀가 없으니 염치를 알리는 만무하고, 먹고 살기 바쁜 일반 국민들이 더운 환경 속에 ‘턱스크’ 한다고 염치를 들먹이기엔 과도한 표현이라 생각하고 접어둔다.

최근 수원지법 안산지원 형사부 판결문이 기사화된 적 있다. 민노총 건설노조 간부에 대한 양형이유를 설명하며 담당판사는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그토록 준수하라고 외쳤던 법과 제도를 파괴하는 것은 정작 피고인’이라고 소리 높였다. 인용한 판결문에 따르면 민노총 노조간부는 ‘민주노총 노조원 고용’을 요구하며 주민복지센터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확성기 시위를 벌여왔다. 시위 소음은 주택가 소음 기준치를 훨씬 초과했으며 설치된 확성기를 떼려 하자 욕설을 하며 경찰관을 승합차 지붕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다른 경찰관이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려 하자 1㎏가량의 철제 공구함으로 그의 머리를 찍기도 했다. 당시 최후 변론에서 민노총 간부는 자신은 전태일처럼 준법을 촉구한 행위였다라고 항변했다.

염치는 이미 상실된 지 오래다. 현실은 오직 ‘내로남불’과 ‘편가르기’만이 남아 있다. 80년대 교문을 부수고 도로를 점령하던 학생 운동권의 ‘독재타도’라는 명분이 늘 실정법 위에 군림했듯이 내 편에 불리한 판결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끝없는 코로나19의 위협만큼이나 염치없는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두렵다. 법의 공정성이 우리들 삶의 기준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이유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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