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용계서원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된 용계서원은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초기 문신인 경은 이맹전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이맹전은 조선 단종을 위하여 수절한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탐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서원은 3칸 대문채를 통해 들어가면 강당이 있고 그 뒤에 사주문을 지나 생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다. 김진홍 기자.


한 여름의 무더위가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 풍광이 완연하다. 세상은 온통 코로나19로 답답하고 어수선하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또 온다.

요즘처럼 햇살이 따사롭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를 속칭 ‘황금가을’이라고 부른다. 일 년 중 가장 살기좋은 시기라는 뜻이다. 올해는 이 황금가을을 등한시 하지않고 가을을 즐겨야겠다.

햇볕이 좋은 날 영천 용계서원을 찾아 나섰다.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린 후 곧 영천에 닿았다. 영천은 포도의 고장답게 온 천지가 포도밭이다.

◆영천은 서원의 고장

영천 시가지로 접어들자 곳곳에 서원 안내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영천에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임고서원을 비롯해 용계서원과 귀천, 금호, 도계, 도참, 송곡, 연계, 창대서원 등 서원이 9곳이나 있다.

이중 임고서원이 1500년대에 창건돼 가장 빠르고, 1600년대 7개소, 1700년대에 6개소, 1800년대에 1개소가 건립됐다.

서원이 많다는 것은 그 지역의 교육열이 높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림 유생들이 만든 사립교육기관이라 당연히 학식이 높은 학자들도 많이 배출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도 있어 명실 공히 향촌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로 영천지역의 모든 서원들도 헐렸다. 일부는 서당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대부분 후대에 복원됐다.

영천에서 국도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가다보면 영천댐이 나온다. 댐주변에서 한박자 쉬며 여유를 가지노라면 눈앞에 펼쳐진 호수로 인해 가슴이 시원해진다.

영천댐 일주도로를 따라 보현산 방향으로 가다보면 마치 고깔같은 모습을 한 기룡산이 병풍처럼 영천댐을 둘러싸고 있다.

보현산과 기룡산 사이의 골짜기가 용산리 골짜기다. 용산마을의 주변을 둘러보니 절경이다. 영천댐의 아름다운 물길과 그 위로 우뚝 솟은 기륭산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영천댐 중상류에 기룡산 원각골의 산골마을이라 마치 동화속의 마을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푯말을 따라 정겨운 시골 마을길로 접어들어 복숭아와 자두 등 과일밭을 지나면 어느새 용산리 원각마을이다. 마을입구에 있는 고목나무 군락지와 정자가 눈길을 끈다. 그 곳을 지나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머금은 용계서원이 있다. 앞은 영천호수를 두고, 뒤는 기룡산이 턱 버티고 있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생육신 이맹전 선생의 절개가 스며있는 용계서원

용계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익공계 형식으로 건축된 누각식의 팔작집이다. 낮은 기단 위에 누마루를 높이 짜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용계서원은 영천시 자영면 용산리 303번지에 위치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경은 이맹전(1392~1480년)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죽은 후인 정조 6년(1782년) 왕명으로 지어진 사원이다.

원래 토곡동에 건립됐으나 고종 5년(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노항동으로 옮겨가 한동안 서당으로 사용됐다.

그러다 1976년 영천댐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용산동 산기슭으로 옮겨왔다.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됐다.

이맹전 선생은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세종 9년(1427년) 친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를 거쳐 정언, 거창현감을 역임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백리로도 유명했다.

때는 계유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이 벌어지며 거창현감으로 있던 이맹전은 이러한 정변의 소용돌이에 분노하고 탄식했다.

결국 그는 장차 단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해 벼슬을 버렸다.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는 배반의 시대에 넌덜머리가 났다.

고향인 구미 선산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호를 경은이라 한 것은 ‘농사나 지으면서 숨어 지낸다’는 의미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인근의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정변 후 체제가 정비되면서 그의 출사를 권하는 조정의 유혹도 끊임 없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단종에게 머물러 있었다.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내친 수양의 사람이 될 수는 없었던 터.

청백한 목민관의 소문은 널리 알려져 있어서 출사의 유혹이 만만찮았다. 때로는 협박조로 출사를 종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벌이는 이런 유혹과 온갖 말을 듣기를 원치 않았다.

마침내 그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면서 돌아앉아 버렸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매달 초하룻날이면 아침 해를 향해 절을 했다.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향한 절이었다.

이후 30년을 하루같이 폐인을 자처하며 손님도 사절하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쪽으로 배좌했고, 북쪽인 한양 쪽으로는 향하지도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인 척 살다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실제 귀머거리인 줄 알았다고 하니 그의 충절은 참으로 지독한 고독이었다.

◆경은의 절개가 곳곳에

용계서원은 아담하고 고풍스럽다. 작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다.

서원 입구는 마치 서원을 보호라도 하듯 수백 년은 된 듯한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고 서원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풀벌레 소리와 진한 나무향이 진동한다.

20평(66.2㎡) 남짓 될까. 아담한 마당은 오히려 더 고즈넉하고 정감이 간다. 세속적인 물욕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는 선비의 공간다웠다.

경은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 볼새라 발에 채이는 돌부리 하나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마당 한 가운데 있는 고풍스런 건물은 유생들이 학문을 닦았던 강당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구조로 건축된 누각식의 팔작집(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이다.

낮은 기단 위해 누마루를 높이 짜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필로티 형식의 구조다.

작은 문간채를 앞에 하고 측면에 툇간을 만들고 밖으로는 난간을 두른 형태다.

담장을 따라 이동하면 서원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팔각지붕에다 사방으로 난간이 있는데 협소한 편이다.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5평(16.5㎡) 남짓한 공간이 나온다. 아마 이곳은 경은을 따르는 유림들이 모여 치열하게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었으리라.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다.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 서재가 없다

서원은 보통 존현과 강학이라는 기능에 따라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서재로 나뉜다.

하지만 용계서원에는 학생들의 기숙시설인 동재·서재가 없다. 대신 중간에 협문이 하나 있을 뿐이다. 아마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던 중 소실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생육신 이맹전과 김시습,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 선생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는 서원 강당 뒤 사당.


강당 뒤에는 사당이 있다. 전형적인 서원의 ‘선학후묘’ 구조다.

사당에는 경은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가 1975년 생육신 김시습,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생육신 6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은 앞쪽 중앙에 계단을 두고, 화강석 다듬돌로 축조한 높다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홑처마 맞배집이다.

사묘 건축의 경우 전퇴 1칸을 둬 개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여기에는 전퇴를 두지 않고 평주칸에 바로 문을 냈다.

사당 안은 꾸밈없이 담백했던 강당과는 달리 형형색색의 화려한 장식의 향연이 펼쳐졌다.

경은과 어울리지 않는 오색찬란한 사당은 평생을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귀머거리로 살아야 했던 경은 선생을 향한 작은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고결한 절개를 떠올리니 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서원 뒤편에는 대나무 숲이 일렁이고 은행나무들이 마치 수호신인 양 사당을 지키고 서 있다.

이맹전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1713년 후손들이 건립한 제단으로 서원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제단 옆에는 가옥이 한 채 있다. 서원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용계서원은 웅장한 맛은 없다. 하지만 초라하지 않았다. 선비의 올곧은 정신이 기둥 하나, 주춧돌 하나에도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 가치 판단의 기준도 바뀐다. 주군을 향한 절개, 믿음, 신념 같은 가치는 현실사회와는 동떨어진 가치일지도 모른다.

팬덤 정치와 편 가르기, ‘내로남불’이 만연한 현대 정치판에서 경은의 우직함과 절개는 오히려 답답해 보이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우직함과 미련함이 오늘날 더욱 존경스러워지는 것은 비단 나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용계서원 사당 우측에는 이맹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의 어명으로 지어진 부조묘 사당이 한 채 더 있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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