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만남, 새로운 시작~

…갑수는 선원생활을 청산하고 대처에서 트럭을 몰았다. 대략 삼 년만 돈을 모으면 작은 가게를 하나 낼 수 있을 듯했다. 좋은 일엔 마가 끼는 법이다. 안개 낀 새벽에 트럭을 몰고 작업장으로 가는 길에 부주의로 그만 노인을 치었다. 갑수는 그 일로 차주와 대판 싸우고 고향의 바닷가로 돌아왔다. 포구를 걷다가 예전에 함께 배를 탔던 동료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저녁에 술자리를 주선해 놓을 테니 갑수에게 꼭 참석하라고 당부했다.

갑수는 어릴 때 양친을 바다에 내주고 박 선주네 집에서 자랐다. 나이가 들자 박 선주의 딸과 약혼하였다. 말하자면 갑수는 박 선주의 데릴사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수는 배에서 잠들어 있던 사고무친 벙어리 처녀를 우연히 발견했다. 바다에서 발견했다고 해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갑수는 해인을 단골식당 사천댁에게 의탁했다. 갑수와 해인, 두 사람은 뭔가 마음이 통했던지 함께 있으면 무척 편안했다. 그런 편안한 관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술에 취한 어느 날 본능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갑수는 박 선주의 딸과 결혼을 강행했다. 해인은 소리 소문 없이 포구를 떠났다.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던 박 선주의 딸은 결혼 후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자기 집에서 불륜장면을 목격한 갑수는 아내와 헤어져 포구를 떠났다. 트럭을 몰며 새로운 삶을 준비하던 차에 사고가 났다.

그날 저녁 술자리엔 함께 배를 탔던 옛 동료들이 거의 다 모였다. 갑수는 과음으로 필름이 끊겨 여관에서 잤다. 그 다음날 아침 선착장에서 동생뻘인 강 선장과 놀고 있는 대여섯 살 난 여자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해인을 의탁했던 그 단골식당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해인을 꼭 빼닮은 모습이었다. 강 선장은 그 여자아이를 갑수의 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갑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언젠가 해인도 포구로 돌아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불합리한 재래풍습 중 하나가 어릴 때 부모가 배필을 정해놓는 정혼이다. 어릴 때 보호자가 미리 짝을 정해놓았다가 나이가 차면 결혼시키는 풍습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현존하지 않는 미래의 존재와의 혼약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끔찍한 일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결혼은 서로의 삶에 큰 상처만 남긴다. 조건만 따지는 정략결혼도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재벌가, 유명인의 파혼을 무단한 현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갑수는 부모와 사별하고 박 선주 집에서 자랐다. 박 선주는 듬직한 갑수를 사윗감으로 점 찍어두었다. 갑수는 약혼녀의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박 선주의 배경과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결혼을 강행하였다. 갑수는 벙어리 처녀를 사랑했고 박 선주의 딸은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선택은 솔직하지 못했다. 잘못된 선택은 오래가지 못한다. 맺어져서는 안 될 남녀의 결합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코앞의 인연을 걷어 찬 대가는 참혹하다. 인연은 한 번 놓치면 다시 오지 않지만 행운이 따르면 다시 오기도 한다. 갑수는 바다가 보낸 천생연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마저 놓쳐버리면 희망은 없다. 다시 만난 인연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건 다행이다. 갑수와 해인의 어린 딸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고리로 등장한다. 한 번의 실수가 구원의 두레박이 된 사연은 상큼한 반전이다. 오철환(문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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