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이 왕권의 위엄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황룡사 건축, 금당 뜯어내고 대규모 장륙존상
어린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어머니의 섭정기간 동안 학문을 익히며 무술 연마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강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왕이 훌륭한 장군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흥왕은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나라의 연호를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으로 명명하며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넓히는 한편 백성들의 안녕을 위한 정책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삼국통일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황룡사를 지어 백성들의 정신적 평화를 이룩하는 통치이념을 일원화 했다. 왕궁을 크게 짓기보다 황룡사를 지어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국왕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갖게 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즉위한 지 14년 계유년(553) 2월의 일이었다. 용궁의 남쪽에 자궁을 지으려 하는데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을 삼고 황룡사라 이름 지었다. 기축년(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을 쌓고 17년 만에 마쳤다.
얼마 있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의 사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살펴보니 쪽지에 글이 적혀있었다. “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지만 이루지 못하고 배에 실어 바다로 띄워 보내노라. 인연 있는 나라, 거기 가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한다”하고, 한 부처님과 두 보살상의 모양을 함께 실어 놓았다.
현의 관리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동축사를 창건하고, 세 불상을 모셔 안치했다.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해 대건 6년 갑오년(574) 3월에 장륙존상을 만드는데 단번에 마쳤다.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들어간 황금이 1만136푼 이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잘 모셨다.
다음해였다. 불상에서 눈물이 흘러 뒤꿈치까지 이르렀는데 땅을 적시기가 한 자나 되었다. 대왕이 돌아가실 조짐이었다.
어떤 이는 불상이 진평왕 때 이루어졌다고 하나 잘못된 말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육왕은 서천축국 대향화국에 사시던 분이다. 부처님이 나신 지 100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진신에게 공양을 바치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이나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공덕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왕의 태자가 혼자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그를 나무랐다.
그러나 남염부제의 16곳, 큰 나라 500곳, 중간크기 나라 1만 곳, 작은 나라 8만 곳의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데 없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에서 만들어냈다. 불상이 완성되자 부처님의 얼굴 모습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 아육은 번역하면 근심이 없다는 말이다.
뒷날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을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이다. 문수보살이 나타나더니 비결을 주면서 “네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가르침을 베풀던 곳이다. 연좌석이 아직까지 있으므로 천축국의 무왕(아육왕)이 황철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300여 년을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 완성해 그 절에 모셨다. 이는 크나큰 인연이 그리 시켜서이다”며 부탁하는 것이었다.
지금 전쟁을 겪은 이래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 상만이 남아있다.
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
진흥왕은 18세가 되면서 성인식을 가지고, 친정하는 진짜 왕으로 등극했다. 가장 먼저 그가 무술수업을 하면서 함께 훈련했던 청년들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
진흥왕과 함께 무술을 수련하며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신라의 최고 군사 세력으로 성장해 전쟁터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적군들을 무찔렀다.
진흥왕은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곡창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금관가야를 정벌해 복속시켰다. 가야를 합병하면서 왕족을 비롯한 인재들을 그대로 영입해 신라인으로 귀속시켰다.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친정부대로 성장해 화랑과 함께 기존의 신라 귀족세력을 압도하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했다.
진흥왕은 연이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 황초령, 마운령까지 치고 올라가 영토를 최고로 넓혀 재정적, 인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영토를 넓히면서 진흥왕은 왕의 권위를 높여야 귀족층과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국력이 안정적으로 유지 확산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왕궁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후궁 미실이 진흥왕을 찾아와 조용하게 아뢰었다. “대왕마마, 지금 왕궁을 크게 짓는 것은 국민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사게 되어 갈등을 조장하며 오히려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진흥왕은 미실 후궁의 지혜로운 제안을 옳게 여기고 “왕궁을 지으려 했을 때 황룡이 나타났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땅이라는 게시니 당장 왕궁을 황룡사로 고쳐 국태민안을 위한 절을 지어라”고 명령했다.
미실은 왕의 명령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버이 같은 진흥왕의 마음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에 전국에서 유명 고승들을 비롯해 승려들과 백성들이 황룡사 건축에 참여했다. 17년의 긴 건축기간 동안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자진해서 흙 한 삽이라도 보태려 애썼다.
신라의 국운은 날로 번창했다. 백제와 고구려조차 밀려오는 신라의 위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 전전긍긍했다.
진흥왕 즉위 30년을 넘어가면서 귀족세력들이 암암리에 다시 힘을 길러 왕권에 도전했다. 진흥왕은 귀족들의 세력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다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세우기로 했다. 일장육척에 이르는 본존불과 거대한 좌우의 협시보살, 그리고 십대제자상을 세웠다.
장륙존상이 금당의 지붕보다 높아 황룡사 금당을 뜯어내고 다시 지었다. 장륙존상 앞에 서기만 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불상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였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한 진흥왕의 세력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버린 미실과 귀족층의 연합세력에 밀렸다. 진흥왕은 흥륜사에 감금되면서 정복군주의 삶을 마감했다.
진흥왕이 황룡사와 왕궁을 떠나 흥륜사 법당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눈물을 흘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