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

휴가 기간에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을 다시 읽었다.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가 갑자기 죽고 난 뒤 한 남자가 겪은 일을 다룬 ‘고인’이 새롭게 와 닿았다. 소설 속 남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은 언제나 같은 단 하나의 이야기만 갖고 있다. 나는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나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그녀의 옷 안에서 그녀의 말속에서 살았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도 못 할 정도로,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내가 이 지구에 있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서 오는 모든 것에 의해 완벽하게 싸이고 묶이고 사로잡힌 채 살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이 비 내리는 어느 저녁, 몸이 젖은 채 집에 돌아와서는 몸져누웠다. 고열이 났지만 빛나는 시선은 슬퍼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걸자 그녀는 답은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죽었다. 그녀를 묻고 파리로 돌아온 남자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슬픔이 되살아났다. 어느날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묘지로 가고 있었다. 그녀의 묘지 대리석 십자가에는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다 잠들었노라”라고 적혀 있었다.

남자는 그날 밤 묘지에 머무르면서 죽은 자들이 관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비문을 고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가 앉아있던 묘지의 주인도 밖으로 나와 “여기 쟈끄 올리방이 쉰한 살의 나이로 잠들다. 우인들을 사랑했고, 정직했으며, 선량한 그는 주님의 평화 속에서 잠들었노라”라는 비문을 끝이 날카로운 돌로 긁어 지웠다. 그리고는 “여기 쟈끄 올리방이 쉰한 살의 나이로 잠들다. 유산상속을 바라면서 가혹함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했고, 아내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아이들을 괴롭혔고, 이웃을 속였고, 기회만 있으면 도둑질을 한 그는 비참하게 죽었노라.”라고 고쳤다.

고쳐쓰기를 마치자 시체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체들이 무덤에서 나와 가족이 묘비에 새긴 거짓말을 지우고는 진실을 써넣고 있었다. 모두가 주위 사람을 괴롭힌 가증스럽고 파렴치하고 위선적인 거짓말쟁이였으며, 간사한 모략꾼이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세기의 소설이 21세기인 지금의 이야기로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가 죽고 난 뒤 나에게도 틀림없이 일어날 일이었다. 갑자기 특정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좋아하는 ‘ㅇ파, ㅇ빠’가 떠올랐다. 이들 역시 지금 지지하는 특정인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가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이고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을 지지하는 이야기만 존재한다. 나는 우연히 그를 만났고, 그를 사랑했다. 그것이 전부다…나는 그에게서 오는 모든 것에 의해 완벽하게 싸이고 묶이고 사로잡힌 채 살았다.” 그가 죽으면 “임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벗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청빈하고 겸손하게 살았다. 임은 우리 모두의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우리의 영원한 존경과 사랑 속에서 여기 잠들다”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새길 것이다.

남자는 묻혀있는 모두가 묘비를 고치는 것을 보고 그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시체와 해골 사이를 뛰어다녔다. 수의로 덮여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그녀도 자신의 묘비를 이렇게 고쳐 놓았다. “어느날 불륜 관계를 맺으러 나갔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죽었노라.” 소설은 “이튿날 아침, 정신을 잃고 무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나를 사람들이 떼 메고 왔다고 한다”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순진한 추종자들을 앞세워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나 자신과 나를 감싸고 있는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했으며 정직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나는 세상을 크게 한판 속였고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노라.” 이렇게 고쳐진 묘비를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할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 추종자들을 떠올리며 모파상 자신의 묘비명을 다시 음미해 본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