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의 추억은 풋사랑일 뿐~

…두섭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다. 근오는 한 마을에 사는 부랄 친구로 두섭과 형제처럼 지낸다. 그 역시 노총각. 시골 촌구석으로 시집올 여자가 없다. 그나마 근오는 전문대학까지 나온 까닭에 중학교를 중퇴한 두섭보단 조금 낫다. 노모를 모시고 촌에서 살아야 하는 조건 때문에 번번이 혼사가 깨졌다. 근오는 지난해부터 대학동기와 사귀고 있었지만 두섭은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섭섭한 감정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친형제보다 더 막역하게 지내온 사이에 그 엄청난 비밀을 장기간 숨겼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두섭이 근오에게 그 일을 캐물었을 때, 근오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깊고 진지했다. 근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섭은 더 이상 그 일을 추궁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 후, 근오는 가끔 두섭에게 그 여자에 대한 근황을 들려주었다. 그러던 차에 두섭도 고모에게서 중신이 들어왔다. 애 둘 있는 이혼녀로 어릴 적 우물가에서 보고 가슴에 담아뒀던 여자다. 전학 가는 바람에 잊고 지냈던 풋사랑이다. 굳이 말하자면 첫사랑일지도 모른다. 노모와 고모는 두 사람의 혼사를 성사시키고자 과할 정도로 그를 들볶아댔다. 그러나 두섭은 그녀와의 만남마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 와중에 두섭은 근오가 사귀던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질투와 섭섭함으로 감정이 축축하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결혼을 축하해 줄 생각에 술을 사들고 근오네 집으로 갔다. 본의 아니게 근오와 약혼자의 대화를 엿듣는다. 무식한 친구와 만나지 말라는 약혼자의 말에 그의 절친 근오는 놀랍게도 순순히 맞장구친다. 두섭이 장가든다는 소문 때문에 옹고집 근오 모친이 결혼 후 자식 분가를 전격적으로 허락해줌으로써 그들 결혼이 성사된 충격적인 내용도 알게 된다. 경황없는 가운데 두섭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그 편지를 또 꺼내 읽는다. 벌써 몇 번째 읽어 보는지 모른다. 맞선 보자는 그 여인의 편지다. 한 달 후 이민 간다며 부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라는 내용이다.…

농촌총각에게 시집갈 처녀가 거의 없는 현실이 처연하다. 짝짓기는 본능이다. 이 본능 앞에 죽마고우도 헌신짝이다. 이 엄청난 희생은 차치하고 농사엔 돈과 시간과 땀이 들어간다. 그에 비한다면 그 대가는 초라하다. 인간생존에 불가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농산물의 상대가격은 분노할 수준이다. 상대적 희소성이 낮은 점도 장애요인이지만 꼭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필수품이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더 큰 문제다. 저렴한 가격으로 먹거리를 공급해야 하는 필연적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 불만과 본능적 울분은 해소할 길이 없다.

맺어질 수 없는 사정을 미리 알고 있는 그에게 노모와 고모의 과도한 설득과 압박은 갈등을 최고조로 끌고 간다. 그의 집 우물을 좋아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때는 그 우물을 시멘트로 덮고 난 후다. 우물 뚜껑을 깨부수려고 해머를 내리치는 모습은 그래서 절절하고 애처롭다. 해머 자루가 부서진 장면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우물은 첫사랑의 추억이다. 어릴 때 길렀던 고양이가 쥐약을 먹고 떠나갔다. 친하게 지내던 앞집 고양이마저 쥐 맛을 본 후, 부랄 친구가 그랬듯이, 그를 등졌다. 고양이는 우정의 상징이다.

문학이 어휘를 갈고닦는 언어예술이라면 이연주는 그에 부응하는 흔치 않는 작가다. 낯선 우리말을 풀어내는 화려한 필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운 우물’을 독파하려면 필히 우리말사전을 옆에 펴둬야 할 터이다. 오철환(문인)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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