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는 ‘2분 증오’라는 시간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2분간의 이 시간이 되면 신기술의 하나인 텔레스크린에 나타나는 적(반혁명분자)을 향해 온갖 증오를 퍼붓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괴성을 지르는가 하면 욕설을 하는 등 아주 격렬한 증오감을 표출해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물론 2분 증오의 시간에 이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사상경찰에 끌려간다.

소설 속의 ‘2분 증오’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좌우 진영으로 너무나 확연하게 나뉜 현재 대한민국에선 서로에게 증오를 표출한다. 여기엔 2분이라는 시간 제한조차 없다. 사사건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사안에 대해 빠짐없이 상대 진영을 향해 온갖 분노를 쏟아낸다. 내편이냐 아니냐 하나만 중요하다. 내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무조건 악이다. 왼쪽과 오른쪽만 있지 중간이 없다. 나아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줄서기를 강요한다. 중간을 선택하면 여지없이 회색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워 비난을 퍼붓는다. 좌우, 흑백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시켜줄 중간 영역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완충지대가 사라졌으니 극렬한 대립만 있을 뿐이다.

이런 대립엔 브레이크가 없다. 이제 그만둘 수조차도 없는 심각한 상태다. 상대를 향한 극심한 분노와 증오만 남기는 대립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2분 증오’ 시간을 통해 내부불만을 적에 대한 증오로 분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은연 중에 우리는 소설 ‘1984’에서처럼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이 무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몇몇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바쁘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한 몇몇의 욕심으로 나라가 혼란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멈춰야 할 때와 멈춰야 할 곳을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멈춤은 예전부터 처신을 가다듬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는 노자 도덕경의 내용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칠 줄을 안다는 것은 멈출 곳, 멈출 때를 아는 것이다.

고려시대 문인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지지헌(止止軒)’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고선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했다. ‘대저 이른바 지지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게 되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夫所謂止止者, 能知其所止而止者也. 非其所止而止, 其止也非止止也)’

이를 두고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는 ‘죽비소리(2005)’에서 지지란 그칠 데 그치고 멈출 데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그칠 수 있을 때 그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다. 또 그쳐서는 안될 곳에 그쳐서도 되지 않으니 설자리 앉을자리를 가려야 한다는 말이다. 머물러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분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절한 때에 욕심을 그치지 못해서, 멈추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는 걸 수없이 봐왔다. 현재도 많이 보고 있기도 하다. ‘이때까지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괜찮겠지’라는 함정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말장난 같기도 한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지지지지(知止止止)’. 멈춰야 할 때를 알고 멈춰야 할 때 멈추라는 뜻이다. 단순한 글자에 불과한 ‘止(그칠지)’자를 나열해 깨달음을 전해준다. 정민 교수는 그의 책 ‘일침(一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은 자리를 잘 가려야 한다.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지지(止止)다. 떠나야 할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으면 결국 추하게 쫓겨난다.”

문제는 몇백 년 이어온 이런 통찰의 경지를 망각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고, 물러나야 할 때 오히려 (제자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욕심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늘 자신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이 자리는 내 자리인가? 멈출 때를 놓친 것은 아닌가? 지금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인데, 혹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건 아닌가?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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