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암서원은 1702년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1705년 ‘흥암’이라는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이 있다. 김진홍 기자
▲ 흥암서원은 1702년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1705년 ‘흥암’이라는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이 있다. 김진홍 기자
흥암서원

여름철이어서 서원 마당은 잡초들로 붐볐다. 여름철이어서라기보다는 서원을 돌보지 않은 무관심이 잡초를 불러들였다고 해야 옳겠다. 들판에 자생하는 풀들이 채소밭을 침범하면 그 이름이 잡초로 바뀐다. ‘풀’이 ‘잡초’로 이름이 바뀌어 지는 순간 그것은 제거돼야 할 몹쓸 처지가 된다. 채소밭을 뒤덮은 잡초들이 그러하듯이 서원의 뜰에 붐비는 잡초들은 선비의 고적한 기운을 해친다. 잡초들로 붐비는 일상, 잡초들이 들끓는 정치로부터 민족사의 비극은 시작된다. 날뛰는 잡초들의 소음이 견디기 힘들어 뉴스 채널을 끄고 사는 나날이었다. 맥 빠진 민초들은 미스터 트롯으로 마음을 달래는 날들이었다. 흥암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61호)을 찾았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 위패를 모시고 있는 흥암사.
▲ 위패를 모시고 있는 흥암사.


흥암사, 진수당, 집의재, 의인재, 어필비각 등 경내 건물을 가진 흥암서원(상주시 연원동 769번지)은 숙종 28년(1702년)에 세워진 사액서원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의 흥암사는 동춘당의 위패를 모신 곳이고, 팔작지붕의 진수당은 강당, 집의재와 의인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였다. 어필비각 안에는 숙종이 지어준 ‘흥암서원(興巖書院)’이라 새긴 비가 있다. 찾는 이의 발길도 없고, 좁은 농로 한 끝에 방치된 듯 스산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대원군의 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곳이었다. 동춘당 송준길은 누구인가? 그가 잡초로 들끓는 오늘의 세태를 향해 던지는 역사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 흥암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된 팔작지붕의 진수당.
▲ 흥암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된 팔작지붕의 진수당.


조선조 후기 문신이었던 송준길(1606~1672년)은 효종 때 판서를 지낸 주자학의 대가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 당색은 서인, 율곡 이이를 사숙한 기호학파의 중심이었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었다. 장인이기도 한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해 퇴계학맥을 이은 그를 사표로 받들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릴 만큼 당대 역사에 이름을 남긴 분이다. 광해군의 난세에 등을 돌리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효종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발을 딛는다. 1649년 즉위한 효종이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이조판서에 기용하는 등 척화파와 재야학자들을 대거 등용할 때였다. 송시열 등과 함께 발탁돼 집의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는다. 집의로 있으면서 송준길은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한다. 침략만 받아온 조선의 역사임을 상기할 때, 그 성패와 상관없이 ‘북벌’이라는 말만으로도 가슴 찡한 바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효종의 북벌론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삼전도의 치욕 아직도 남아

1637년 1월 조선은 청국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남한산성에서 끌려나온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바닥에 머리를 찧는 예를 행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치욕이다.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간다. 1645년 2월이었다. 청국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국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차남인 봉림대군은 청과의 전쟁을 주장한다. 청 태종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화살을 맞은 새’라 자탄하며 청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칠 때였다. 효종은 소현세자를 멀리하고 경계한다.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손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한다. 임금으로 즉위한 효종은 반청척화파(反淸斥和派)의 인물을 등용, 북벌을 준비한다. 남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어청의 군사력을 정비하고, 이완을 대장으로 어영청군을 크게 증가시킨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 송준길 등을 등용해 군비를 확충한다. 그러나 삼전도의 치욕을 씻으려는 북벌계획은 효종의 승하와 함께 수포로 돌아간다.

후대의 논객들이 지적하듯이 효종의 북벌론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리려 한 허황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성 없는 지배계층의 지속된 북벌의식은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막아 정치적 쇄국주의, 문화적 폐쇄주의를 낳게 한 가장 큰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전도의 역사적 치욕을 씻으려는 자세와 정신, 국격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려 했던 당당한 북벌의지마저 폄하돼서는 안 된다.



▲ 진수당 뒤 마당 좌우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집의재와 의인재.
▲ 진수당 뒤 마당 좌우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집의재와 의인재.


서원 뒤뜰의 잡초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무성했다. 담당 관청에게 까닭을 묻는다면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뻔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었다. 그렇게 방대한 추경예산으로 왜, 문화재 앞뒤 마당 잡초 뽑는 일자리는 늘리지 않는가. 길가 휴지 줍기보다, 가로등 소등하기보다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 하찮다는 말인가!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돈과 밥과 권력과 무관한 일에는 침묵해도 좋은가. 위대한 침묵도 있고 비열한 침묵도 있다. 죽을 때까지 묵언 수행하는 수도사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은 Into Great Silence이고, 한 시인이 신군부시절 지식인들의 비굴함을 풍자한 침묵은 ‘침을 퉤퉤 뱉어 만든 묵’이다. 신문 기사를 옮긴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이날 ‘옥류관 주방장 오수봉’이 쓴 글을 내보냈다. 오수봉은 “평양에 와서 우리의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는 주제에 오늘은 또 우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으니 이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그 더러운 똥개무리들(탈북민 단체)과 그것들의 망나니짓을 묵인하며 한 짝이 되여 돌아친 자들을 몽땅 잡아다가 우리 주방의 구이로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조선비즈 2020.06.13.)



▲ 진수당 왼쪽 문을 지나면 서재와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 진수당 왼쪽 문을 지나면 서재와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국민들의 마음에 오물을 끼얹은 모멸적인 언동에 왜 침묵하는가. 하찮은 주방장 말쯤이야… 전략적 차원의 위대한 침묵인가. 꼬리를 감추는 비열한 침묵인가. 안타깝고 딱하다. 안타깝고 딱한 오늘의 시점에서 효종의 북벌의지를 바라보니 그것이 한갓 계란으로 바위 치는 허황된 꿈이었다 하더라도 그날의 꿈은 당당했으므로 숭고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민(安民)과 내치(內治)가 먼저이고, 안민과 내치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격군심(格君心)에 있다는 송준길의 주장은 탁월한 바 있다.

송준길은 존명배청(尊明排淸)과 복수설치(復讐雪恥) 운동을 추진한다. 현실을 직시한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허황한 꿈에 앞서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조선은 수년간 지속된 대기근과 청의 대약진이라는 악조건 속에 처해있었다. 이에 송준길이 추진한 현실 정책은 외양에 앞서 내수를 다지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이었다. 내치(內治)는 외양(外攘)의 근본이고, 치병(治兵)은 안민이 우선이라고 했다. 내수의 핵심은 양민(良民)과 격군심(格君心)이었다. 송준길은 군주의 덕성함양과 심성수양이 곧 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 주장한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백성의 마음, 임금의 됨됨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북벌 진출의 한을 남긴 채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송준길의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었다. 하늘도 안타까워, “이날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고 그 빛이 땅을 비추니 길을 가던 사람이 바라보고는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는데, 와서 보니 선생이 막 운명하였다. 이해 10월 성관(星官)의 ‘소미성이 동방에 떨어졌다.’라는 발언이 있었는데, 권상하는 송준길의 죽음이 바로 성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고 애석해 하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 1716년 숙종이 하사한 어서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어필비각.
▲ 1716년 숙종이 하사한 어서를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어필비각.


잡초 북적이는 흥암서원을 나서며 ‘격군심(格君心)’이라는 말을 되새겼다. 격군심이라는 말이 구한말 이 땅을 찾았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를 불러내었다. 강자 앞에 굽실대는 조선인들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했던 비숍이, 러시아 자치구 프리모스키에 이주한 조선인들의 당당한 삶의 현장을 만난 뒤에는 자신의 생각을 고친다. “정부가 부패하지 않고 잘해주기만 한다면,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우수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정부를 거꾸로 읽으면 부정(不正/不淨)이 된다. 당당하지 못한 정부는 거꾸로 된 정부이다. 당당한 국민이 당당한 정부와 당당한 역사를 만들고, 당당한 정부가 당당한 국민과 당당한 역사를 만든다.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효종의 북벌의지, 동춘당 송준길의 북벌운동은 당당했으므로 아름다운 민족사의 한 획이었다.



강현국

시인·사단법인 녹색연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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