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바람꽃/ 윤중리

~바람처럼 지나간 바람꽃~

…나는 교직을 명퇴했다. 교황청은 바울로 탄생 2000주년을 기념하여 ‘바울로의 해’를 선포하는 한편 성지순례에 전대사까지 허용하였다. 이를 기화로 성지순례 대열에 자연스레 동참하였다. 그동안 미처 고해성사를 하지 못한 일도 없지 않아 꺼림칙한 차에 전대사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다. 성지순례 코스는 터키와 그리스 일대다. 터키에서 만난 가이드는 둥글납작한 한국여성이었다. 상영빈, 그녀는 현지에서 십 년째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성지순례를 안내할 땐 세례명인 프란체스카를 썼다. 어디서 본 듯한 인상과 친근한 눈매 속에서 문득 추억의 연인, 박소희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녀 남편이 상 씨였다. 혹시 그녀의 딸이 아닐까. 박소희를 처음 만난 곳은 야생화 전시회다. “세월은 덧없어 청춘은 가고 소복한 바람꽃 바람에 지네.” 그녀 이름을 보고 방명록에 쓴 글귀다. 그게 인연이 되어 만남을 이어갔다. 계곡에서 족욕을 하고 나온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은 인근 모텔에서 밤을 함께 보냈다. 그날 이후 양심의 가책으로 갈등하고 방황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에게서 봉함엽서를 받았다. 운명적인 그 글귀가 작별을 고했다. 그 후, 그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남편은 암으로 죽고 어린 딸을 데리고 서울로 갔다는 풍문을 들었다. 프란체스카가 그녀의 딸이란 직감이 들었다. 프란체스카에게 어머니의 고향과 성씨를 물어보았다. 고향은 모르고, 어머니 성씨는 백씨라 했다. 그냥 분위기만 비슷한 여성이란 말인가. 이스탄불 공항에서 작별하면서 남은 달러화와 유로화를 프란체스카에게 주었다. 미리 준비한 듯 그녀도 작은 선물을 내놓았다. 비행기 안에서 그 선물을 꺼내 포장을 풀었다. 종이상자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운명의 그 글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박소희의 딸이라는 사실을 숨긴 일에 대해 용서를 빌면서 어머니의 소식을 덧붙였다. 두 해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편지 몇 통을 발견하고 그 내밀한 사연을 알았단다. 순례자명단을 보고 혹시 했지만, 어머니에 대해 캐묻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고 한다. 힘이 쭉 빠지면서 눈물이 났다.…

금슬 좋은 노부부가 있었다. 뭇사람들의 귀감이 될 정도로 반듯하게 살아왔다. 남편이 임종하는 정숙한 아내의 손을 잡고 죽기 전에 꼭 알고 싶다면서 한평생 자기만 사랑했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 손을 꼭 쥐고 빙그레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여운이 길다. 한평생 담아둔 사연에서 인향이 짙게 배어나온다.

결혼한 남녀가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을 느끼고 갈등하는 일은 결코 드물지 않다. 대부분 순수하게 사랑할 뿐 불순한 욕망은 없다고 자기합리화 한다. 실제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순수한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후끈 달아오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몰래 잠복하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언제든지 고개를 쳐들기 때문이다. 문제가 불거지면 자신들은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우연히 귀한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사는 게 인생이다. 그런 인연이 거듭 주어지는 행운은 축복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도 일어난다. 우연히 만나 서로 사랑하다가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일은 희귀하다. 하물며 그 연인의 딸을 이역만리에서 우연히 만나는 인연이야 신의 한수다. 그 귀한 인연을 함께 공감하는 일도 행운이다. 소복한 바람꽃, 박꽃 소희, 흰 피부, 백씨, 항상 영으로 빈 여자 상영빈으로 이어지는 하얀 인연은 작가만의 은유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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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onoo*****2020-07-21 10:23:49

예전에 서양 영화에서 연인이었던 사람들의 자녀가 다시 만나 엄마, 아빠의 얘기를 하며 사랑을 키워가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적이 있는데 이런 시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랫동안 좋은 글 많이 소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