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일반

쉬/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이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하시겄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쉬」 (문학동네, 2006)

효는 근본적인 인과관계다. 원초적이긴 하나 소홀히 하기 쉽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이기 때문에 굳이 강령이나 교리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자식사랑은 오히려 제어해야할 정도로 넘치기 십상이다. 반면 그 반대 방향인 효는 실천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효를 윤리의 기본개념으로 삼고 그 실천을 강조한다. 효를 아무리 강조해도 잘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은 역설적으로 효를 강조해야 되는 이유다.

갓난애는 기초대사에서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전부 부모의 손에 달려 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분가해 홀로서기 할 때까지도 부모가 죄다 뒷바라지 한다. 독립했다고 영 떠나가는 건 아니다. 부모는 자식이 장성해도 세 살 난 아이 물가에 놓은 것 같은 마음으로 지켜본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획득형질이 아니라 타고난 특성이다. 자식이 필요할 때 부모는 기댈 언덕이지만 부모가 필요할 때 자식은 돌아앉는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유아상태로 떨어진다.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가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자식이 그 은혜를 되갚아야 할 기회다. 부모는 되갚음을 기대하지도 않고 헌신한다. 하지만 자식은 먼저 받은 시혜마저 잊어버리고 귀찮아한다. 효는 인위적이다.

해난사고로 사망한 남의 집 자식들이나 교통사고로 죽은 생면부지의 애들에 대한 애도는 지극 정성인데 제 부모상은 호상이라며 웃음을 흘리며 성가신 일을 처리한 듯 홀가분해한다. 부모는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신세다. 애완동물을 반려라 하면서 먹이고 씻기고 뉘이고 닦인다. 병들면 기백만 원의 거금을 들여 병원에 데려간다. 그 반면에 부모에게 드는 돈은 기십만 원을 두고 벌벌 떨면서 자식 간 신경전을 벌인다. 사후 유산 다툼으로 머리 터지게 싸우는 모습은 논외다. 부모를 개나 고양이 정도만 취급해줘도 다행이랄까. 우울하고 비참한 세태다.

노래자 일화가 떠오른다. 노래자는 고희에도 부모 스스로 늙었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려고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 때로는 일부러 엎어져 마루에 뒹굴면서 애처럼 울기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를 즐겁게 해 준 것이다. 그렇게까지 바랄 수야 없겠지만 그 효심의 반만이라도 가져준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환갑지난 아들이 아흔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뉘면서 어리광부리듯 애정을 보이는 모습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사랑으로 키워낸 아들이 이제 늙은 아버지를 안고 쉬를 뉜다. 아들은 더 오래 붙들어 두고 싶고, 어버지는 안쓰러워 그만 명줄을 놓아버리고 싶다. 우주도 감동한 듯 숨을 죽인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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