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 불고 비만 내려라/ 꿈결에서도 찾아와/ 창문 흔들면서/ 내 안에 물 흘러가는 소리 들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지고 비 내린다고/ 세상이 전부 어두워지겠느냐/ 저렇게 밖에 나와 서 있는 것들/ 축축하게 젖는다고/ 어디 갖다 버리기야 하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문 열고 나가/ 몸 맡길 용기도 없는 게지/ 아니 내가 장마였을 게다/ 나로 인해/ 아침부터 날 어두워진 것들/ 적지 않았을 테고/ 나 때문에 눈물로 젖은 것들/ 셀 수 없었으리라/ 깊은 물속을 걸어가려니/ 발걸음 떼기가 그리 쉽지 않았겠지/ 바싹 달라붙은 마음으로/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졌을 거고/ 그러하니 평생 줄 사랑을/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 테니/ 속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다

『흐린 날에는 비명을 지른다』 (한누리미디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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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에 대한 인식이 다 같지 않다. 목마르게 장맛비를 기다리는 농사꾼이 있는 반면 여행 계획을 잡아놓고 맑은 날만 고대하는 사람도 있다. 도시사람은 대개 장마를 귀찮아한다. 허구한 날 시도 때도 없이 씻어 조지고 소변만 조금 누고도 물을 쓰는 일상을 즐기는 사람이 가끔 오는 비에도 얼굴을 찡그리기 일쑤다. 가뭄으로 농산물가격이 폭등하게 되면 살기 어려워지는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장마는 돈다발이다. 장마는 모든 존재에 활력을 충전시켜주는 은총이다. 풀과 나무는 물론 돌과 흙도 활기를 띤다. 초식동물은 싱싱한 풀밭을 그리며 가슴을 벌렁거리고 육식동물은 살이 오른 먹이를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지렁이도 기지개를 켜며 길을 나서고 미생물마저 꿈틀거리며 알을 깐다. 공짜 샤워는 덤이다.

장마철이다. 지겹도록 비가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거나 하늘이 무너진 듯 억수같이 비가 내린다.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다. 오래지 않아 비가 그칠 것을 믿지만 걱정은 팔자다. 집과 살림살이가 떠내려가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다. 천지개벽할 홍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한 건 아니다. 예지자도 없거니와 노아의 방주도 준비되지 않았다. 해는 사라지고 사방이 어둡다. 물러나 있을 뿐 이대로 해가 사라진 건 아니다. 밝은 날이 많았으니 어두운 날도 오기 마련이다. 삼라만상이 장맛비에 흠뻑 젖는다. 비를 맞아 축축하게 젖는다고 갖다 버릴 일은 없다. 마음껏 맞아도 좋다. 해가 나서 마르면 본모습이 쉬이 돌아올진대 몸을 사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모조리 받아들이고 미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장마에 흠뻑 젖는 것처럼 아낌없이 깡그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절실함이 없는 건지, 용기가 없는 건지. 쓸쓸함은 장마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장마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장마라 생각하니 지난일이 새롭게 다가온다. 반성하고 사죄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밝음보다 어두움을 주었으니 싫어할 사람이 많을 법하다. 폭우로 발이 묶인 경우도 많고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한 일도 없지 않다. 산사태로 집을 잃은 초점 잃은 눈동자가 먹먹하게 전해온다. 비가 새는 방안에서 가슴 졸이며 잠 못 드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받이 그릇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지켜보는 겁먹은 눈망울이 가슴을 후벼 판다. 허나 장맛비는 사랑이고 생명이다. 한 사나흘 비를 흠뻑 맞을 일이다. 속속들이 철저하게 젖어야 한다. 젖어야 비로소 얻는다. 사랑과 생명을 온 누리에 듬뿍 나눠주고 싶을 뿐이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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