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왜구보다 더 나쁜

이야기를 거꾸로 시작해본다. 그러자 이런 의심이 든다. 위안부 문제, 우리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피해자들은 원상회복에 버금가는 치유가 가능할까. 뚱딴지같은 소리지만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윤미향 국회의원의 대응과 손영미 위안부 쉼터 소장 사건이 겹치면서 드는 생각이다.

30년동안 정의기억연대는 매 수요일마다 집회를 열고 일본을 향해 사과하라, 배상하라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우리 국민들에게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항일운동의 선봉을 자처했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해주면서 스스로 목표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공식적으로 240명이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겨우 17분만 살아 계신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도 75년이 지났으니 위안부의 피해는 이미 역사의 한 부분이 됐다. 피해자들이 살아생전에 원상회복과 같은 피해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실제 일어날 것 같지 않다. 무슨 토착왜구 같은 발언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일본의 국가급 사과는 곧 일본의 국가적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결기의 다른 표현이나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동안 일본은 몇 차례 사과했고 보상책도 내놓았다. 다만 우리 눈높이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것이 피해 당사자나 일반 국민의 시각인지, 또는 정의연으로 대표되는 피해자지원 단체의 시각인지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일본이 우리가 원하는 수준으로 항복할까. 일본이 항복한 적이 있긴 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하고, 그리고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연거푸 원자폭탄의 위력을 경험하고 나서다.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무조건 항복’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방송에서는 ‘항복’의 ‘ㅎ’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소(美英支蘇) 사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으니….” 포츠담 회담의 결과를 승인하는 모양으로 항복을 에둘러 선언한 것이다. 포츠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미영중소 4개국 대표가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은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 등을 요구한 것이다.

스스로를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주장하는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들 앞에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딴 사람이 챙겼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미국 등으로 끌고 다니며 고생시키고 ‘이용했다’고도 했다.

이런 할머니의 폭로에 대해 미 의회 ‘위안부 결의안’의 주역인 마이크 혼다 전 하원의원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의연의 활동이 당초 목적이나 젊은이들 교육 보다는 시위 자체에 치중돼 있다고 지적하고 변화 필요성을 시사했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의 언론 인터뷰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나 실질적인 피해 보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위안부가 존재하는 것처럼 읽혔다. 마치 실현 가능성 없는 목표를 정해놓고 위안부들을 그 간판으로 내걸고 국민들을 대일본 심리전 졸개로 내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모두가 정의연이나 윤미향 의원의 활동에 대한 순수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판에 토착왜구가 등장했다. 왜구라니,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용당했다면 이용한 자들은 토착왜구보다 더 나쁘지 않은가.

이제 정의연의 활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필연적 수순이 됐다. 회계부정만도 작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뒤로 제쳐두고 정치인들이 위안부 할머니를 이용해서 또 다른 목적을 갖고 이용했다는 의심을 키워온 때문이다. 그 운동의 목표도, 방향도 이제는 실질적인 피해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그 다음은 사냥개를 삶는다고 했다. 그 토끼가 있어야 사냥개도 계속 먹이를 얻고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토끼는 잡아서는 안 된다. 이런 의심을 불식시켜야 위안부 지원 사회운동도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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