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환(幻)

김채원

~밥상을 차리는 여인~

…나는 마흔세 살의 이혼녀다. 연인의 권유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글을 쓴다. 한 번도 여자로 느끼지 못한 주제에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일이 어색하지만 조금 흥분된다.

산불이 발발하여 헬기로 불을 끄는 장면이 뉴스에 나온다. 집안 아저씨와 내가 오늘 외할머니 묘소에서 낸 산불이다. 한편 뜨거운 불기운이 망자의 응어리를 녹여줄 것 같다. 나는 어머니와 손모양이 닮았다. 어머니는 손이 달아서 반찬이 맛있다고 자랑하곤 한다. 김치는 수긍하지만 된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어머니는 교직생활을 오래 하셨으나 아버지에게 소박당한 후로 화투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얻어 가족을 버렸다. 객지에서 병사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 아버지는 없다. 나는 서른둘에 결혼했다. 신혼여행 중 바닷가 횟집에서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남편의 샐쭉한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시아버지의 장례 때, 새까맣게 떨어져 내리던 눈의 아우성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결혼 육 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없는 것도 큰 이유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결혼예물 때문이었다. 그 후 쭉 어머니와 살고 있다. 어느 날, 길을 찾는 어떤 남자를 만났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남자였다. 그 부름에 잠시 멈추는 그 순간, 사랑이 갑자기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어느새 3년이다.

외할머니는 북에서 온 피난민이다. 외할아버지가 첩을 얻어 나가는 바람에 외할머니는 홑몸으로 외삼촌과 딸 셋을 키웠다. 기댈 곳 없는 낯선 곳에서 고생을 달고 살았다. 외삼촌은 6·25때 월북했다. 우리는 뒤늦게 피난을 갔지만 외할머니는 집에 남았다. 공산당이라도 늙은이는 해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월북한 아들을 만나보려던 의도도 작용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할머니는 이모 댁으로 옮겨갔다. 그 후, 양치 중에 쓰러져 며칠 동안 의식 없이 자리 보존하다가 운명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다투곤 했다. 내림인지 나도 어머니와 끈질기게 싸웠다. 그래선지 어머니도 마침내 쓰러졌다. 다행히 회생되긴 했지만 다리에 힘이 빠져 병상에 누웠다. 이젠 어머니와 화해할 때가 되었다. 어머니와의 화해는 연인과의 결별이라는 또 다른 선택을 내포할 수 있다. 어머니와 연인은 서로 엇갈리는 운명인지 모른다. 어머니와 화해한다 해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박이다. 소멸해 가는 어머니를 맡은 것은 운명이다. 어머니가 몸이 아파 할머니를 이모 댁에 인계한 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우린 실향민이다. 산불은 아베크족의 실화로 밝혀진다.…

환(幻)은 변화하는 둥근 원이고 윤회를 상징한다. 외할머니의 운명이 어머니로 이어지고 어머니의 팔자가 또 그 딸에게 전해진다. 외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여성 3대가 모두 다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그 디테일이 조금 변형되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 유사한 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작가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에 대한 본질을 밝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나는 여자의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로 자기자리를 찾아간다. 기다리는 사랑이 아닌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랑이 요체다. 밥상을 기다리는 여자에서 따뜻한 밥상을 차리는 여자로 거듭난다. 사랑은 또한 삶의 쓸쓸함을 벗어나는 묘약이다. 따뜻한 밥상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도 사랑이란 마음으로 이어진다. 여성의 일상과 의식의 흐름 속에서 삶의 허망함을 담담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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