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5)

..................................................................................................................

지구는 풀의 전성기다. 나무가 많긴 하지만 풀의 기세를 당할 수 없다. 야생화나 이름 없는 들꽃은 풀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유명세가 있는 꽃들은 풀이기를 거부하지만. 인간이 버릇을 그렇게 들인 탓이다. 허나 시인이 보는 풀은 바람에 흔들릴 정도의 키가 제법 크고 늘씬한 풀이다. 키가 작거나 땅바닥에 바짝 붙어 기는 잡초를 불러올 상황은 아니다. 어쩌면 강가에 일렁이는 갈대일 수 있고, 산등성이에 군집하는 억새풀일 수 있다. 갈대나 억새풀은 아니더라도 쭉 빠진 몸매를 과시하는 강변의 물풀 군락 앞에 서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동쪽 하늘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동풍이 비를 싣고 온다. 하늘하늘한 풀들은 서편으로 떠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바람의 뒤태를 돌아보며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한다. 바람은 야속하게 돌아보지도 않지만 애써 데리고 온 빗물을 선물처럼 남기고 간다. 풀은 무뚝뚝한 바람의 속마음을 알아채고 감읍한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지경이다. 구름이 머물며 풀에게 빗물을 듬뿍 내려준다. 배부른 풀들은 구름아래 느긋하게 눕는다.

바람이 남기고 간 빗물이 다하면 풀잎마저 꺼칠하다. 풀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녘 하늘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싱싱한 물 내음이 멀리서 전해온다. 풀은 엎드려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실어올 빗물을 그리며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눈물이 핑 돈다. 풀은 비 바라기다. 고운 님의 얼굴을 보려고 살짝 고개를 들어본다. 빗물이 내려와 입을 맞추면 풀은 그제야 사랑을 확인하고 긴장을 푼다. 풀이 눕는다. 폭포수마냥 쏟아지는 도파민을 온몸으로 맞이한다. 이젠 풀은 바람의 기척만 느껴져도 절로 몸을 숙인다. 바람은 또 지나가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다. 풀은 행복에 겨워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린다. 다음에 또 고운 님 오는 날, 그땐 결코 울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웃으면서 의연하게 님을 맞으리라 다짐한다. 어느덧 날이 가면 또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떠 온다. 풀들은 아예 풀뿌리까지 눕혀 님을 맞이한다. 바람과 구름과 풀이 미소 짓는 모습은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나라 잃은 식민지의 민초는 기댈 곳이 없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그런 환경에 주눅 들기 마련이다. 허나, 시인은 겉으론 겁 많고 눈 큰 사슴 같지만 안으론 불의에 분개하고 억압과 강압에 반항하는 지사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청춘을 보내고 한창 활동할 나이에 참혹한 내전을 겪었다. 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혀있기도 했다. 칠흑 같은 질곡을 헤매다가 만신창이가 된 맑은 영혼이다. 감수성이 풍선처럼 부푼 시인이 바라본 풀밭은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광경이다. 봄비에 이슬을 살포시 머금은 채 바람에 일렁이는 연초록 빛 풀밭은 그 자체 아름다운 시다. 바람과 구름, 비와 풀이 보여주는 배품과 나눔은 시인이 찾던 이상향일지 모른다. 풀과 바람을 민초와 외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