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이거나 아니거나

박명숙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라/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라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라/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

.......................................................................................................................

박명숙은 대구 출생으로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은빛 소나기』『어머니와 어머니가』『그늘의 문장』과 시조선집으로 『찔레꽃 수제비』등이 있다. 1990년대 전반에 등장한 탁월한 시인들로 박권숙, 이종문, 이달균 등을 들 때 박명숙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 세계는 개성적이기 때문이다.

‘신발이거나 아니거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시는 아니다. 지나치게 자상한 시는 금방 식상할 수 있다. 제목부터가 심상치가 않다. 신발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 대상을 두고 시의 화자는 대뜸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고 진술한다. 신발이 돌연 구름이 되고, 그것도 한 켤레 먹구름이 된다. 그런데 그것은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기도 하다. 또 다시 훌쩍 공간 이동을 하여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 된다. 연이어서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으로 결론짓는다.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고. 제목부터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도입한 이후 시종일관 확장은유를 원용하여 해득이 불가능한 상상력의 육화, 낯선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새로운 시의 한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한 켤레 먹구름, 벗겨진 시간, 헌신짝 같은 섬 등과 같은 개성적인 구절들이 서로 맞물려서 미묘한 정서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심금을 울리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로 ‘신발이거나 아니거나’는 신들려서 쓴 듯하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시의 주제나 메시지가 무얼까 하고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직이 읊조리면서 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리라 생각된다.

그의 다른 시편으로 ‘어린이날’이 있다. 뜻밖의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말이며 눈빛이며 주고받기도 무심한 날 텅 빈 동네 놀이터에서 시소 타는 노부부에게 어린이날은 그다지 외로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날이다. 기운이 철철 넘치거나 생기발랄할 수 없는 연조이기에 노부부 사이에 뜨거운 정담이 오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이 비교적 건강한 가운데 함께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문짝 나간 버스 같은 허술한 가슴으로 젊은 날 추억들이 무임승차를 하는 날에 그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바람에 눈을 헹구며 시소를 탄다. 이런 어린이날을 두고 시의 화자는 노인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참 쓸쓸하고 서글픈 정경이다.

그의 또 다른 작품에 ‘드므’가 있다. 불가해한 일면을 가진 시다. 두려웠다, 거기도 내 얼굴이 남아 있었다, 라는 첫머리가 섬뜩하다. 내 얼굴이 거기에도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시의 화자에게는 적잖은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그 얼굴은 천길 물속을 타고 오른 일그러진 두 눈빛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석양이 피를 길어내며 그 눈빛을 끄고 있었기에 달아날 수가 없었고, 불길에 휩싸인 채로 물길에 감긴 그대로 독 안에 든 시간이었다, 라고 진술한다. 끝으로‘드므’는 한 역할을 한다. 즉 얼굴에 기록된 죄들을 드므가 씻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므’는 많은 내용을 함유하고 있지만,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자기반성, 내적 성찰의 깊이가 특유의 시어들과 만나 새로운 미학적 세계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고즈넉한 혼자만의 골방에서 며칠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불현듯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어린이날’, ‘드므’와 같은 비범한 시편을 얻게 되지 않을까.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