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김소해

붉은 입술 그보다 붉어 조용한 검은 입술/ 함부로는 아니지만 입을 열면 소나긴 듯/ 백지를/ 적시는 고백/ 백년이든 읽겠습니다

-단시조집, 『대장장이 딸』(작가, 2020)

김소해는 경남 남해 출생으로 1983년 현대시조 추천완료 후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으로 『투승점을 찍다』『만 권인 줄 몰랐다』와 시조선집 『하늘빗장』, 단시조집 『대장장이 딸』등이 있다. 그의 시조는 단아한 서정과 더불어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발화를 보인다. 시 자체에 대해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삶의 방향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형상화하기도 한다. 웅숭깊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비유와 주제의식의 발현으로 공감대를 넓히기도 한다.

근간에 시조공동체가 더불어 힘쓰고 있는 많은 일들은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되고 있다. 다만 시조문단에서만 그것을 알 뿐 외부사회는 여전히 무관심하다. 선조가 물려준 정신적 문화유산 가운데 시조만한 것이 얼마나 더 있을까? 또 그 일을 위해서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김소해 시인, 그가 그 일익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청 시절에 유독 잘 찢어지는 갱지에 향나무 연필로 시를 즐겨 썼던 기억이 있다. 흑연 냄새와 나무 향기가 나는 연필이 시를 더 잘 쓰게 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필로 시 쓰기를 즐겼던 것이다. 이처럼 연필은 글 쓰는 이에게는 설렘의 대상이다. 잘 깎아놓은 향기로운 연필을 보면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백지에 새로운 시 한 편을 펼쳐보고자 하는 창작 욕망이다. 시의 화자는 붉은 입술 그보다 붉어 조용한 검은 입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검은 입술이라니! 무언가 도전적이지 않는가. 참신한 비유가 시의 품격을 높인다. 함부로는 아니지만 입을 열면 소나긴 듯, 에서 보듯 소나기가 등장한 것은 시인의 작업에 불이 붙었다 것을 의미한다. 연필 끝으로 내리꽂히는 시의 빗줄기를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마침내 백지를 적시는 고백이기에 백년이든 읽겠습니다, 라고 작정하듯이 말한다. 어찌 천년인들 못 읽겠는가.

그는 또 다른 단시조‘대장장이 딸’에서 사랑을 훔치려다 불을 훔치고 말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정작 얻으려고 한 것은 사랑인데 불을 훔친 것이다. 무쇠 시우쇠, 조선낫을 얻기까지 숯덩이 사르는 불꽃 명치 아래 풀무질은 종생토록 다함이 없을 것이다. 시인은 대장장이이자 대장장이의 딸이기도 하다. 조선낫을 얻기까지, 한 편의 시를 얻기까지 풀무질을 결코 한시도 쉴 수가 없다. 그러한 강렬한 창작의지의 발현이 곧 ‘대장장이 딸’이다. ‘연필’과 연계해서 읽으면 그 뜻이 더 깊어질 것이다.

앞에서 보다시피 그의 시조는 참신하다. 낡지 않다. 예측 불허의 결구를 통해 반전의 묘미를 드러내기도 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탐구한다. 그의 단시조는 하나의 전범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언어미학적 성취와 함께 도저한 깊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 시조를 신앙처럼 받들며 살고 있기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조를 통해 백년만의 고백, 백년의 고백을 거듭한다. 자신과 당대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시조로 부단히 표출한다. 진정으로 미쁘게 여기고 있는 세상을 향한 답신이자 시조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그의 빛나는 시조 인생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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