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길

이태수

날 저물고 새들도 둥지에 든다./ 서늘한 바람의 옷자락,/ 그 감촉에 몸 맡기며 숲길 돌아들면/ 땅거미 안으면서 어깨 추스르는 나무들/ 가지와 가지들 사이로 별이 뜬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지난날들이,/ 불현듯 그의 마지막 말들이 뜬다./ 차마 잊지 못하고 있는 말들은 저토록/ 별이 되어 빛을 뿌린다. 하나 둘, 그리고 여럿/ 그 별들이 숲에 내린다. 가슴에 스며든다./ 우리는 이제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음을,/ 다른 세상에서 더러는 그리워할 뿐임을/ 말해주는 건지. 가까이 다가왔다가는/ 이내 다시 멀어진다. 여태 애태우던/ 말들도, 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제각각/ 허공에 빈 메아리로 떠돌고 있는지……/ 마음마저 더 어두워지고, 집도 점점/ 멀어지는, 낯선 저녁 숲길.

『회화나무 그늘』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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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숲은 많은 것을 품고 감춰준다. 그래서 숲은 푸근하다. 저녁 숲길은 고요하다 못해 멍 때리는 소리마저 들린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사위에서 물들어오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새들마저 둥지에 든다. 바람이 불어와 무료함을 달래듯 등을 두드린다. 바람의 옷자락을 잡고 숲길로 접어들면 땅거미가 나무들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어둠을 살며시 품은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반짝인다. 가슴에 담아두고 외면해 왔던 기억들이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별들은 잊었던 지난 추억을 토해낸다.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진다. 별빛을 듬뿍 받은 숲이 숨겨둔 추억을 일깨운다. 그의 마지막 말들이 별빛을 받아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켠다. 숲은 모른 척 돌아앉아 마음 없는 바람을 슬며시 막아선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른 길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서 망설이다가 산새가 지저귀는 작은 오솔길로 걸어갔다. 사람이 많이 다닌 곧게 난 길로 가면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지만 시인은 갈림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각자 다른 길 위에 있으며 돌아갈 수 없다. 어둠이 깊어지고 하늘엔 이름 모를 별들이 얼굴을 내밀고 미소 짓는다. 별빛이 가슴으로 스민다. 함께 가자던 말이 생생하다. 그가 간 길이 떠오른다. 시인이 아쉬워한 만큼 그도 시인이 선택한 길을 그리워할 터다. 가지 않은 길이 숲속으로 꼬리를 감추고, 애태우던 기억들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여태까지 애태우며 추억했던 말들과 안타깝게 반추했던 그리움이 메아리 되어 허공을 맴돈다. 마음의 별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시인이 사는 집은 점점 멀어진다. 새삼스레 저녁의 숲길이 낯설다.

저녁 늦게 숲길을 걸으면 지나온 길들이 별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다. 이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접는다. 별빛 담은 숲은 오랫동안 지나는 사람들을 보듬고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한껏 지혜를 쌓아왔다. 시인은 숲이 터득한 지혜를 빌리고자 저녁 즈음 숲길로 들어간다. 앞으로 가야할 남은 여정이 길밖에 뒹굴고 있다. 눈 밝은 시절엔 여기가 어디쯤이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보였다. 무엇 때문에 가는지, 어떻게 가야할지, 숲에게 묻지 않았다. 이젠 눈이 침침하다. 사위가 어둡다. 있는 곳도 잘 분간되지 않고 가야 할 곳도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뭐라고 채근하지만 귀가 어두워 알아들을 수 없다. 여태 먼 길을 걸어왔으나 제대로 온 것인지도 의문이다. 어떤 곳을 향해 어디로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지, 저녁 숲길을 걸으며 별빛 담긴 숲에게 묻는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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