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 시인 천영애
▲ 시인 천영애
이 영화는 한국 영화에 대한 나의 모든 고정관념을 깨게 해 준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한국 영화는 시나리오가 부실하고 뭔가 모르게 엉성하면서 재미는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도 이렇게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물론 그 이전의 이창동의 영화 〈시〉도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이 영화만큼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하루키의 원작이 훨씬 비중이 크다. 하루키의 단편을 읽고 이 영화를 본다면 이창동이 만들어 놓은 메타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하루 종일 햇살이 잠깐 들어오는, 그것도 남산 전망대의 유리창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인 집에서 사는 해미와 고향 친구인 종수는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온 해미는 그곳에서 개츠비 같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그런데 이 남자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두 달에 한 번 정도로 정기적인.

해미는 자기가 어렸을 때 우물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종수였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종수에게는 그 기억이 없고, 해미의 엄마나 언니, 동네 사람들은 우물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종수의 엄마만이 마른 우물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우물은 이 영화의 중요한 하나의 메타포이다.

벤은 요리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걸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 그것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제물을 만들고 그걸 먹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부시맨들이 추는 춤에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있다고 알려준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서 배가 고픈 사람이다. 해미와 종수는 둘 다이지만 벤은 단지 개츠비일 뿐이다.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돈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

들판에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것들이 많다고 벤은 말한다. 쓸모없고,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그들은 자신이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것이다.

벤은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고 희열을 느끼는데 과연 그가 불태우는 비닐하우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비닐하우스가 쓸모없고 불필요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는 것일까. 벤은 판단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비 같은 것이라서 거기에는 자연의 도덕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도덕이란 무엇일까. 약육강식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어느날 벤은 종수의 가까워도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울 것이라고 예고하고 해미는 실종된다.

이 영화에서 비닐하우스와 우물은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메타포인데 벤에게 쓸모없고 불필요한 수많은 비닐하우스들이 불태워질 것을 깨달은 종수는 벤의 배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는다. 세상에 불필요하고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는 없고, 그것들은 원래부터 이유가 있어서 존재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비닐하우스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우물에 빠졌을까, 리틀 헝거? 혹은 그레이트 헝거?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