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김양희

나는 크레용이다 스물넷 복작이는 틈살구 분홍 초록이 온 세상을 누빌 때스스로 나서지 않는 가장자리 무채색왜 나는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없지빨강 노랑 파랑에 잘 어우러지지만드러나 도드라지지 않고 스며드는 색깔이제라도 알게 돼 정말로 다행이다하나로 충분하면 더 바랄 게 없지만누구의 배색이어도 괜찮아 나는 나야 -『오늘의 시조 제12호』(201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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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는 제주 한림 출생으로 2016년 시조시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그는 2019년 제1회 정음시조문학상 수상작인 ‘절망을 뜯어내다’라는 작품에서 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사물과 삶의 본질을 추구하고 언어의 창조적 비밀에까지 이르고자 한 점과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미학적 기원에 대한 충동과 성취, 경쾌한 언어와 고전적 상상력이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는 시 세계 등이 주목된다.

그는 ‘그레이’에서 색깔에 대한 자각을 노래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색이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갈린다. 화자는 스물넷 복작이는 틈에 있는 나는 크레용이다라고 고백한다. 살구 분홍 초록이 온 세상을 누빌 때에도 스스로 나서지 않는 가장자리 무채색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 나는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없지라고 자신에게 묻는다.

그는 빨강 노랑 파랑에 잘 어우러지지만 드러나 도드라지지 않고 스며드는 색깔임을 밝힌다. 또한 이제라도 알게 돼 정말로 다행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로 충분하면 더 바랄 게 없지만 누구의 배색이어도 괜찮아라고 자신을 다잡으며 ‘나는 나야’라고 결론짓는다. 자존감의 극대화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함축하고 있다.

분홍색이나 초록색만 동경할 것이 아니라 그레이도 사랑받는 색깔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화자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치유라고 해도 좋겠다. 나서며 튀는 존재는 아니지만 드러나지 않은 채 그런 이들과 잘 어우러지면서 그들을 지지하고 또 다른 존재의 중요성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알게 돼 정말로 다행이다, 괜찮아 나는 나야, 라는 결구에서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는 자신의 참된 가치와 본질을 알아 의미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이’는 나와 타자를 치유하는 시편인 셈이다.

그가 발표한 시의 제목들은 매우 다채롭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시가 되고 있다. ‘나팔꽃이 나팔꽃에게, 나무에 든 밥알, 노을 무렵, 시리아의 밤, 혜화역 부근, 벽보 광고, 가자 지구, 힐, 젠더. 짐볼, 절망을 뜯어내다, 어물전주인, 만남의 재발견’등을 보면 그 점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작품들 속에는 따사로운 가족애와 생명 사랑이 담겨 있고, 시대의 아픔을 직시하여 밀도 높게 형상화한 실감실정의 시편들도 적지 않다. 또한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시로서 우리 사회를 견인하고 치유하고자하는 열망을 형상화하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그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아는 시인이다. ‘그레이’와 ‘절망을 뜯어내다’를 다시금 음미하며 우리 모두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일에 대해 더 따스한 눈길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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