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에 와서



유해자



이곳에/ 닿기까지 몇 굽이 돌았던가/ 돌담 이끼 틈에 눌러앉은 가을볕/ 도는 게/ 지름길 되는 비밀/ 넌지시 귀띔한다



더러는/ 발길 멈춰 오던 길 돌아보고/ 빼곡한 문장에다 쉼표를 찍으라며/ 강둑에/ 늙은 느티나무/ 손사래쳐 부르는



상처가/ 깊을수록 햇살이 반짝이는 걸/ 종종걸음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몰랐다

강물이/ 굽은 이유를/ 하회에 와 알았다

-시조집『동박새 울음에 뜨는 별』(토방,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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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자는 충북 진천 출생으로 1997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문학사상 시조부문에 유일하게 뽑힌 신인이다. 1999년 시조집 『동박새 울음에 뜨는 별』을 펴냈다.

‘하회에 와서’는 담백한 시편이다. 이곳에 닿기까지 몇 굽이 돌았던가 하고 반문하면서 돌담 이끼 틈에 눌러앉은 가을볕을 눈여겨본다. 도는 게 지름길 되는 비밀 넌지시 귀띔하는 하회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더러는 발길 멈춰 오던 길 돌아보고 빼곡한 문장에다 쉼표를 찍으라며 강둑에 늙은 느티나무 손사래쳐 부르는 것을 보면서 여유를 가진다. 셋째 수에서는 어떤 자각을 보인다. 즉 상처가 깊을수록 햇살이 반짝이는 걸 종종걸음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고, 강물이 굽은 이유까지도 하회에 와서야 살피게 된 것이다. 담담한 진술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모습에서 관조의 깊이를 느끼게 된다.

그는 ‘나는, 독이 되고 싶다’라는 시조에서 비어서 가득 넘치는 빈 독이 되고 싶다, 라는 이미지로 결구를 맺고 있다. 낯익은 것이지만 시 속에 담겨 있는 정서가 소박해서 그 낯익음조차도 명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시적 재치다. 그러면서 가난한 부엌의 늘 허기진 쌀독이거나 한 시절 절여내는 소금독도 괜찮지만 입맛에 딱 맞기로는 장독대 빈 독임을 힘주어 말한다. 특히 인상적인 텅 빈 뱃속 그들먹이 허공을 들이키고 바람도 품었다가 달빛도 울궜다가 라는 구절은 그만이 직조할 수 있는 내밀한 전통적 의미망이어서 공감을 안겨준다. 정결하고 정갈한 시품이다. 정신을 드맑게 하고, 옷매무새를 조심스레 가다듬게 한다.

그는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할 무렵 ‘평화고물상’, ‘내 몸이 말을 한다’, ‘벽송사 소나무’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박기섭은 ‘벽송사 소나무’를 두고 자연은 자연이되 그냥 통념적인 자연이 아닌 환한 심상으로 꿰뚫는 자연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또한‘평화고물상’은 낡은 의자와 자전거, 냉장고와 같은 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안겨준다. 바람에 온몸 내맡긴 채 시간을 삭히면서 싱싱한 햇살과 바람을 차곡차곡 쟁여 넣는 평화고물상의 여러 기물들은 삶의 희망을 또렷이 말하고 있다.

한밭이라고 불리는 대전에서 펜촉을 벼리고 있는 시인의 시조‘하회에 와서’는 가을 서정을 노래하고 있지만 늦봄에 읽어도 감흥이 일어난다. 여러 차례 가본 적이 있는 하회마을이 병산서원의 풍광과 겹쳐져서 떠오른다. 정갈하고도 맑은 서정 시인이 연륜이 깊어지면서 이즈음은 사색의 깊이가 담긴 시를 매만지며 창작에 전념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찍 핀 봄꽃들이 다 지고 난 정원에 요즘은 키 큰 산딸나무가 수천수만 송이 흰 꽃을 피우고 있다. 새로운 위로가 되는 개화다. 시인의 작품도 그처럼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소망한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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