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초의 가람 흥륜사, 아도화상이 죽고 신라 불교는 다시 쇠퇴

▲ 신라에는 전불시대의 일곱 가람터가 있다고 전한다. 흥륜사, 영흥사, 영묘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담암사 등이다. 신라의 왕이 허락해 아도가 처음 불교를 전파하던 곳이 흥륜사다. 지금 경주공고의 위치가 흥륜사 터로 전해진다.
▲ 신라에는 전불시대의 일곱 가람터가 있다고 전한다. 흥륜사, 영흥사, 영묘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담암사 등이다. 신라의 왕이 허락해 아도가 처음 불교를 전파하던 곳이 흥륜사다. 지금 경주공고의 위치가 흥륜사 터로 전해진다.
신라에 불교가 시작된 시기는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고 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시기는 미추왕과 눌지왕 때로 추정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왕실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라에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은 흥륜사라는 기록이 있다. 흥륜사에서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이 법회를 주관했다. 나중에는 진흥왕에 이어 법흥왕까지 승복을 입고 흥륜사 주지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지금 알려지고 있는 흥륜사는 발굴 과정에서 영묘사 명문의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 자리로 추정되고, 경주공고 자리가 흥륜사 터로 짐작된다.

신라는 불국토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에, 석가모니가 불법을 전파하기 이전에 신라에 불법을 전했던 일곱 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칠처가람이다. 전법시대의 불적 칠처가람을 둘러본다.

▲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담암사 또는 담엄사로 전해지는 절터는 오릉의 동남쪽이라는 기록이다. 오릉 숲 속에 담엄사의 것으로 보이는 당간지주 하나가 누워있다.
▲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담암사 또는 담엄사로 전해지는 절터는 오릉의 동남쪽이라는 기록이다. 오릉 숲 속에 담엄사의 것으로 보이는 당간지주 하나가 누워있다.
◆삼국유사: 칠처가람

아도본비에 아도의 불법 공부와 칠처가람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인데 정시 연간 240~248년에 조조의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를 가까이해 아도를 낳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출가하라 하였고, 열여섯에 위나라로 가서 굴마를 만나 뵌 다음 현창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

열아홉 살에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이 나라는 이제껏 불교를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 3천여 달이 지난 다음, 계림국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라며 칠처가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 안에 일곱 군데의 가람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사천의 끝, 여섯째는 신유림, 일곱째는 서청전이다.

▲ 칠처가람 중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에 거북이 모형 기단이 있는 당간지주가 서 있다. 어느 절의 소속인지 정확하지 않아 마을 이름을 따서 구황동 당간지주로 불린다.
▲ 칠처가람 중 분황사와 황룡사 사이에 거북이 모형 기단이 있는 당간지주가 서 있다. 어느 절의 소속인지 정확하지 않아 마을 이름을 따서 구황동 당간지주로 불린다.
모두 전생의 부처님 때 가람터요 불법의 물이 오래도록 흐를 땅이다. 너는 거기에 가서 큰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마땅히 동쪽에서 부처님 앞에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아도는 불교를 전파하러 계림에 이르러 왕성의 서쪽 마을 지금의 엄장사에 머물렀다. 그때는 미추왕이 즉위한 지 2년인 계미년(263)이었다.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가르치겠다고 청했으나 이전에 보지 못한 바라 꺼리며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피신하여 속림에 있는 모록의 집에 숨었다.

미추왕 3년에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으나 무당과 의사가 고치질 못하자 사방으로 신하를 보내 의사를 찾았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대궐로 나아가 그 병을 깨끗이 고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물었다.

“하찮은 중은 아무것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할 따름입니다.”

왕은 허락하였다. 명령을 내려 공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집을 세우고 살면서 가르쳤다. 때때로 하늘에서 꽃이 땅에 내리기도 했다. 이 절의 이름이 흥륜사이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인데 스님에게 와서 비구니가 되었다. 삼천지에도 영흥사라는 절을 짓고 살았다.

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 아도화상이 입적한 이후로 신라에 전파되었던 불교도 사라지게 되었다.

▲ 칠처가람 중 하나로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됐다. 용이 살았다는 우물터는 아직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탑이 분황사모전석탑이다.
▲ 칠처가람 중 하나로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됐다. 용이 살았다는 우물터는 아직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탑이 분황사모전석탑이다.
◆칠처가람: 천경림 흥륜사

흥륜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미추왕 때 창건했다는 설과 눌지왕 때에 창건했다는 설이 부딪치고 있다. 대부분 눌지왕 때로 보는 것이 정설로 통용된다.

신라시대 당시에는 흥륜사도 국가사찰로 건립, 운영됐지만 여전히 초가로 검소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사찰이 건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왕이 죽고 자연히 폐허가 되었다.

흥륜사는 법흥왕 당시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었다. 이차돈의 죽음에 따른 이적에 놀라고, 감탄해 천경림에 대가람을 중창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진흥왕 5년 544년에야 완공해 대왕흥륜사라 했다.

그리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승려 되기를 해제하고, 일반 백성에게 출가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진흥왕은 만년에 스스로 삭발하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아 흥륜사의 주지가 되었다.

▲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흥륜사로 알고 사적 제15호로 지정된 곳. 발굴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터로 전해진다.
▲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흥륜사로 알고 사적 제15호로 지정된 곳. 발굴에서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터로 전해진다.
흥륜사는 나라가 주관하는 도량으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거나 복을 비는 가람으로 발전했다.

흥륜사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도 다양하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전 재산을 보시해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절이 흥륜사다. 또 호랑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출세가도를 걷게 된 나무꾼 청년 김현의 이야기도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염불하는 복회에서 비롯된다.

흥륜사가 유명한 것은 금당에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의상·혜숙·안함의 그림이 있었고,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자장·혜공·사파의 상이 그려져 있었다.

흥륜사 금당의 좌우에는 행랑이 있었고, 좌경루와 남지 연못과 탑이 있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길달문은 귀교를 건축했다는 비형의 무리 중 길달이라는 도깨비가 지었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

▲ 문무왕이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명랑법사에게 창건하게 해 문두루비법으로 당군을 수장시켰다는 사천왕사지의 당간지주.
▲ 문무왕이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명랑법사에게 창건하게 해 문두루비법으로 당군을 수장시켰다는 사천왕사지의 당간지주.
흥륜사는 방화와 중수를 거쳐 여러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된 이후 완전히 폐사되었다.

남은 유물로 석조와 배례석이 있다. 흥륜사 석조는 신라의 석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조선시대 동헌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 진흥왕이 화랑을 만들고 불교 진흥을 위해 지은 황룡사지에는 금당터와 황룡사구층목탑지 등의 다양한 흔적이 남아 있다. 목탑지 남쪽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던 기초석이 남아 있는 중문터.
▲ 진흥왕이 화랑을 만들고 불교 진흥을 위해 지은 황룡사지에는 금당터와 황룡사구층목탑지 등의 다양한 흔적이 남아 있다. 목탑지 남쪽에 금강역사상을 세웠던 기초석이 남아 있는 중문터.
◆새로 쓰는 삼국유사: 흥륜사의 비사

흥륜사는 창건할 때부터 국가의 사찰로 승려는 물론 법회에 참석하는 인사들이 왕을 비롯한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어서 경비도 삼엄했다. 때문에 경비를 담당하는 부서도 정부의 병부에서 직접 관여했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결성하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힘을 키우는 기본으로 삼았다.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의 세력에 힘입어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러나 진흥왕 33년에 태자로 간택했던 아들 동륜이 죽자 흥륜사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선봉에 서서 전장을 누비던 정복자로서의 당당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당시 진흥왕 하반기 정국의 전반에 실질적인 권력자로 행세하던 거칠부는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떠올랐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자주 드나드는 흥륜사 경비부터 자신의 직속 부하들로 전면 교체했다.

▲ 흥륜사 벽에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과 불교를 크게 일으킨 원효대사 등의 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 가장 큰 석조가 발굴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흥륜사의 터 경주공고에 많은 석재들이 남아있다.
▲ 흥륜사 벽에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과 불교를 크게 일으킨 원효대사 등의 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한다. 또 가장 큰 석조가 발굴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흥륜사의 터 경주공고에 많은 석재들이 남아있다.
이어 진흥왕의 후계자로 둘째아들 사륜을 옹립하는 절차를 서둘렀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에게 사륜을 왕으로 추대하면 왕후로 간택하겠다는 밀약을 하고 진흥왕 제거 수순을 밟았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동륜태자의 네 번째 제를 올리는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진흥왕이 제를 올리는 시간에 거칠부의 부하들은 진흥왕의 호위 무사들을 소리없이 제압했다. 그리고 흥륜사 출입을 완전히 폐쇄하면서 진흥왕을 감금하고 영원히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둘째 아들 사륜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진지왕이다.

거칠부는 상대등의 지위에 올라 진지왕을 조정하며 나라의 살림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진지왕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일찍 체념하고 향락에 빠져버렸다. 미실 또한 향락에 빠진 진지왕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노리부와 진흥왕의 유서를 핑계로 진지왕을 폐위하고, 진흥왕의 첫째 아들이자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인 백정을 진평왕으로 옹립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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