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의 여왕’, ‘불과 나의 자서전’’, ‘푸른 눈썹’

‘춘래불사춘’ 봄은 왔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봄 같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다. 그래도 잠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진한 감성으로 봄기운에 빠져 들고 싶은 날, 혼자 가만히 읽으면 좋을 새로 나온 책 몇 권을 꺼내 본다.

▲ 무궁화의 여왕
▲ 무궁화의 여왕
◆무궁화의 여왕/김지영 지음/그레잇윅스/238쪽/1만5천 원

‘무궁화의 여왕’은 미실에 의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쫓겨난 신라 공주가, 오랜 고난을 겪은 뒤 로마와 서역의 지혜를 신라 문화와 통합해 혹세무민하는 어둠의 미실을 내몰고 빛의 문화 제국을 세우는 대서사시다.

사실 선덕여왕의 공주 시절 기록은 전혀 없다. 김지영 작가는 역사의 기록 대신 새로 작품을 창조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역사에서 지워버린 것 같은, 그녀의 젊은 시절 기록이 전무한 것이야말로 내게 극한의 상상력을 요구했다. 즉위 이후의 기록만 존재할 뿐 공주 시절에 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미실은 슬픈 존재다. 미실에 대한 기록은 사서에는 없고 오직 위작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만 나온다. 미실과 덕만 두 신녀간의 대립은 역사적 기록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자전적 경험과 현시대를 담아 은유화한 것이다.

책의 결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실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년에 세력을 잃고 병에 걸려, 절에서 사랑하는 이의 간호를 받으며 죽었다. 그러나 나는 미실이 덕만을 금관의 독으로 죽이려다, 진정한 사랑을 목격해 스스로 독이 가득한 금관을 쓰고 자신을 심판한다고 상상했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묵시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많은 시간을 지역 사찰에서 보냈다. 그래서 팔공산과 부인사는 특별히 인연이 더 깊다고 소개한다. “제 첫 책은 ‘크레이추얼파워’로 선덕여왕 리더쉽을 다룬 내용이었는데, 집필을 위해 부인사를 찾은 날 한 스님께서 ‘고난을 겪을 것이니 참아내라’고 한 말씀이 기억난다”며 “곧 출간 예정인 원작 소설 ‘무궁화의 여왕’에서는 팔공산과 부인사가 중요하게 부각 된다”고 소개했다.

저자는 서역을 떠돌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생사의 고난을 겪고 살아 돌아와, 최초의 통일을 준비한 영웅 ‘김덕만’의 대서사시를 당당하게 펼쳐 보인다.

▲ 불과 나의 자서전
▲ 불과 나의 자서전
◆불과 나의 자서전/김혜진 지음/현대문학/196쪽/1만3천 원

2012년 등단 이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특별한 시선으로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김혜진 작가의 이번 신작은 지난해 ‘현대문학’ 4월호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내놓은 것이다.

재개발 이후 빈부 격차로 양분된 지역사회 간의 갈등으로 황폐한 곳, 대물림되는 빈부에 대한 불안과 집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위태로운 욕망을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이다.

재개발의 광풍마저도 번번이 빗겨간 달동네 남일동의 일부가 부촌인 중앙동으로 행정 편입되며 우리 가족은 중앙동의 주민이 된다. 내 부모는 원래 중앙동에 살았던 듯 남일동에 선을 긋지만, 친구들은 나를 남토(남일동 토박이)라 부르며 은근한 멸시의 눈총을 보낸다.

졸업 후 여행사에 취직한 나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동료를 변호하다 같은 신세가 되고, 그즈음 남일동으로 이사 온 주해와 그녀의 딸 수아를 만난다.

버려진 동네 같았던 남일동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삶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내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지만, 힘들게 입학한 중앙동 초등학교에서 수아가 남민(남일동에 사는 난민)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주혜를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마침내 시작된 남일동 재개발사업. 조합 사무원으로 일하며 힘을 보태던 주혜의 숨겨왔던 부정한 과거가 밝혀지자 마을은 요동치고, 결국 모녀는 남일동을 떠나게 된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주혜의 일그러진 욕망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오버랩되는 나와 내 부모의 모습을 발견한다.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각자의 어긋난 욕망으로 그 세계와 불화하며 번번이 좌절하고 마는 한국 사회의 씁쓸한 모습을 객관적이고 냉담한 시선으로 투사한 소설이다.

▲ 푸른 눈썹
▲ 푸른 눈썹
◆푸른 눈썹/하아무/도서출판 북인/252쪽/1만3천 원

하아무 작가의 소설집 ‘푸른 눈썹’에 실린 9편의 중·단편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하아무의 문학은 주변부 존재들의 깊은 슬픔과 고통의 삶을 담고 있다. 어두운, 그러나 그 슬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앞길을 열어 나가는 ‘아름다운 한의 문학’이다.

하아무 소설의 중심인물은 하나같이 안간힘을 다하지만 가난하고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여운 존재이다. 폄하와 냉대의 차가운 눈길, 이기적 욕망, 배신, 그리고 평화로운 일상 속으로 문득 밀고 들어와 가족을 해치는 느닷없는 폭력이 그들을 가난과 불안정의 삶으로 내몰아 가둔다.

그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고통과 깊은 슬픔으로 언제나 어둡고, 찢겨 피 흘리고 있다. 때로는 타자를 향하는 날카로운 살의에 갇히기도 하고, 자신을 겨누는 자기 파괴의 욕망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모와 이질 두 여인이 있다. 재첩조개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하저구 출신이라 택호가 하저구댁인 이모는 원양어선을 타던 남편을 젊어서 잃었고, 가난 속에서도 정성을 다해 기른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

조카 재은도 참혹한 사고로 어린 딸을 너무나 일찍 떠나보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비난의 말과 눈길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남편조차 그녀를 비난하며 떠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의 블랙홀이 바로 발아래 검은 입을 벌리고 있으니 언제 그 속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그러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기르지 못한다면 그들은 일어설 수 없다.

하아무 소설 세계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들이 토하는 절망의 신음, 하늘에 가닿는 원한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아수라 지옥과도 같다. 이 점에서 하아무 문학은 비참의 문학이다. 그런데 이 같은 비참과 절망의 상황 저 깊은 곳에서는 견디는, 움트는, 나아가고 솟는 신생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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