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조문국(召文國)

박물관은 닫혀있었다. 조문국의 역사를 알리는 유물유적이 코로나19를 피해 격리수용되어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서 책자 몇 권을 받아들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격리수용’이란 말이 도처에서 체감되는 현실이 착잡했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의 극단인 격리수용이란 단절과 구속의 안팎 사태를 함축한다.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의 관계망이 차단된 병적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격리수용이란 말은 햇볕 들지 않는 미궁처럼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를 거느린다. 언제쯤 격리수용된 고독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을까. 갑갑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이웃이라는 ‘곁’이 있어 행복했던 잃어버린 일상을 되찾는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땅과 하늘은 청정하고 인심은 다정다감했을 조문국의 그날이 궁금한 이유이다.

조문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伐休尼師今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벌휴이사금 2년, 정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다.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다.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에서와 같이 벌휴이사금 2년에 패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그 전부이다. 그것도 조문국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자리에 부수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벌휴이사금 2년은 서력기원 185년, 그러니까 조문국은 지금으로부터 1835년 전에 신라에 복속된 고대 부족국가이다.

역사의 전면에서 지워진 나라, 패망의 기록으로 그 정체를 짐작할 수밖에 없는 조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8번 국도를 따라 약 8.5km 지점 금성면 대리동 산 384번지, 조문국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 금성산고분군은 박물관 동쪽 지척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경상북도 기념물에서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155호)승격되었지만 인적이 끊겨 스산했다. 따뜻한 봄날이 무색한 날이었다. 고분군 사이에 조성한 작약꽃밭이 붉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작약꽃밭이 환한 꽃망울을 터뜨릴 무렵이면 조문국의 하늘 밑을 찾는 발길도 잦을지 모르겠다.

때마침 고분군을 찾은 젊은 부부가 힐끗, 나를 쳐다보며 마스크를 낀다. 그것이 경계가 아닌 예의라도 되는 듯이 나도 젊은 부부를 힐끗, 쳐다보며 마스크를 끼었다. 마스크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 격리수용의 징표이다. 반가워야할 한적한 야외에서의 만남이 힐끗 쳐다보는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조문국 백성들도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려야 하는 날들이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벌휴이사금조에서 보듯, 바람과 구름을 점쳐 홍수나 가뭄, 한 해의 풍흉을 예지하는 성인으로 임금을 믿고 따랐던 순하고 착한 백성들에게 어찌 바이러스인들 침투할 수 있었겠는가.

조문정(관망대)에 올라 〈〈조문국의 부활〉〉, 〈〈의성 금성산 고분군〉〉, 〈〈조문국의 지배세력과 친족집단〉〉등의 책자를 여기저기 훑어본다. 1960년 탑리리 고분군이 발굴된 이래 17차례의 매장문화재 조사와 9번의 학술조사의 결과를 묶은 출판물들이다. 발굴조사단은 신라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을 독자적으로 수용한 사실을 확인하고, 관과 귀걸이, 허리띠장식, 고리자루칼 등 다양한 형태의 착장형 위세품을 찾아낸다. 위세품(威勢品)이란 왕이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시키면서 지방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이다. 이들은 출토 유물의 수량과 우수한 품질의 위세품들을 근거로 고분의 형성 시점을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기 전, 초기 국가를 이루고 있던 국읍(國邑) 시기로 추정한다. 뿐만 아니라 고분군의 위치와 출토유물들을 통해 조문국 옛터인 의성 지역이 신라의 단순한 북방 거점지역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는 점을 밝혀낸다. 필자들은 한결같이 조문국은 신라 황금문화의 원산지로서 김씨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지역이었으리라고 적고 있다. 경상도 북부지역에 금광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 근거였다.

1호 고분 경덕왕릉은 고분군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능(陵) 둘레 74m, 전통적인 고분 형식의 봉분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과 가로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 있다. 노랑나비 한 쌍이 날고 있었다. 조문국의 마지막 왕, 전설의 주인공이 말없이 나를 맞았다.

조선 숙종조 〈〈허미수 문집〉〉에 기록된 전설이다.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일구기 위해 작은 언덕을 일구던 중이었다. 갑자기 사람이 드나들만한 큼직한 구멍이 나타났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둘레에 금칠을 한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안 금소상(金塑像) 머리에 쓰고 있는 금관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했지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라”고 이른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 오극겸의 외밭이었다.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난다. “내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현령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다.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왕의 존엄을 지키려는 조문국 유민들의 집단무의식이 경덕왕릉 전설을 만들었을 것이다. 경덕왕은 자신의 나라를 정복한 구도에게 딸의 혼인을 허락한 운모공주의 아버지이다. 어느 왕조이든 마지막 왕이란 비운의 대명사이다. 경덕왕은 망국의 지도자로서 감내해야 할 비운의 시름이 깊었을 것이다. 구도와 운모공주의 혼인은 망국의 비운을 딛고 자신의 백성을 지키려는 경덕왕의 지략에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는 “조문국의 운모공주가 구도에게 시집 가서 옥모를 낳았다”고 기술한다. 구도는 경주에 부인이 있었지만 운모공주와 다시 결혼했던 것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김씨 왕조 시조인 김알지의 6세손인 구도는 최초의 김씨 왕인 13대 미추왕의 아버지다. 구도는 자신의 아들 미추를 왕위에 옹립하는데 조문국의 지원이 필요했고, 경덕왕은 자신의 백성을 지키는데 김씨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구도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라는 991년 동안 56명의 임금이 있었다. 한국사 왕조 중 즉위한 왕의 오르내림이 가장 심한 나라였다. 왕위 찬탈을 위한 왕족 3성 박, 석, 김씨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잦았다. 박씨 왕조는 아달라를 끝으로 석씨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석씨 세력과 김씨 세력이 연대를 형성해 박씨를 밀어냈던 것이다. 아달라의 뒤를 이은 왕이 석탈해의 손자 벌휴이사금이다. 독자적으로는 임금을 낼 힘이 없었던 김씨 세력은 막강한 부를 가진 조문국 맹주들의 지원을 청했을 터이고, 조문국 사람들은 신라로부터 자신들의 세력과 지위를 지키는데 구도의 힘을 빌었을 것이다. 마침내 김씨 세력은 급성장해 왕위 세습을 독점하게 된다. 조문국 지배자들은 망국의 유민이 아니라 운모공주가 신라의 왕비를 배출하는 인통(姻統)인 진골정통이 된 데서 보듯 신라 왕조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막강한 실력자가 된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운모공주와 구도의 혼인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인류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되풀이 되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있는 곳에 이합집산의 모략이 있고 모략이 있는 곳에 살벌한 다툼이 뒤따르니 딱한 노릇이다.

차를 몰아 벚꽃 길을 달렸다.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왕왕거렸다. 반성도 성찰도 없이, 다투어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몰골들이 꼴불견이었다. 마스크를 뒷자리로 벗어던지며 혼잣말로 묻고 혼잣말로 대답했다. 코로나 돌림병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인간의 오만과 편견이 그 출처이다. 코로나 돌림병은 왜 왔는가? 빈부격차도 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의 공포를 살포하는 바이러스의 생태를 보라, 그것은 분명,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으리라. 백신은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나? 모르모트 실험실에는 답이 없다. 일등을 하지 않으면 살맛을 잃는 경주마 신세인 우리 삶의 처지를 벗어나야 하고, 너와 나의 아픔과 애환을 공유하는 영적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코로나19가 종식된다하더라도 또 다른 악성 바이러스가 수시로 찾아와 마스크를 채워 우리네 삶을 숨통 조일 것이다. 힐끗힐끗 서로를 적처럼 경계하는 격리수용의 끔찍한 일상을 강요할 것이다.

강현국(시인·사단법인 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