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년 역사 가야는 멸망하지 않고, 신라 속에 녹아 발전했다

▲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700여 기 중에서 발굴을 거쳐 대규모 유물이 드러나 가야시대의 문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고분이 44호 고분이다. 1977년 경북대학교 발굴팀이 조사했다. 도굴됐지만 금귀걸이, 청동그릇, 은장식최창, 야광 조개 국자 등의 유물이 쏟아졌다. 야광 조개로 만든 국자로 일본과의 교역을 증명하기도 한다.
▲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 700여 기 중에서 발굴을 거쳐 대규모 유물이 드러나 가야시대의 문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고분이 44호 고분이다. 1977년 경북대학교 발굴팀이 조사했다. 도굴됐지만 금귀걸이, 청동그릇, 은장식최창, 야광 조개 국자 등의 유물이 쏟아졌다. 야광 조개로 만든 국자로 일본과의 교역을 증명하기도 한다.
가야는 52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묻혀 우리의 기억에도 희미하다. 최근 고분군에서도 가야의 섬세하고 화려한 역사문화가 발견되면서 가야의 존재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가야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 삼국 사이에 끼어 약소국의 설움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신라에 흡수 통합되면서 가야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혀 잊히고 있었다.

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흡수하면서 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대로 그 땅을 다스리며 신라의 일부 조직처럼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다. 때문에 문무왕이 모계 쪽으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15세손이라 스스로 칭했다.

가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에 병합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지금까지 정신과 핏줄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

▲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산등성이에 오르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능선을 따라 공동묘지라고 할 만큼 거대한 고분군이 집단을 이뤄 아주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70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가야시대 최대규모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7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이 있는 산등성이에 오르면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능선을 따라 공동묘지라고 할 만큼 거대한 고분군이 집단을 이뤄 아주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700여 기의 고분이 밀집된 가야시대 최대규모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7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가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수로왕은 내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 남아 있으니, 신라 종묘에 합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당에서 가까운 좋은 밭 30경을 주어 제사지낼 비용으로 쓰게 하고, 이를 왕위전이라 불러 본토에 부속시켰다. 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관장하며 여러 가지 제물을 갖춰 제사를 지냈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다음부터 용삭원년 신유에 이르는 60년 동안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거르기도 하였다. 문무왕이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서 다시 받들게 했다.

▲ 고분군 입구에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고분군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있다.
▲ 고분군 입구에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고분군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는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있다.
신라 말년에 충지 잡간이란 이가 있었다. 금관성을 쳐서 성주장군이 되었는데 영규 아간이 성주장군의 위세를 빌어 사당에 제사지내는 것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지냈다. 단오날 사당에 고하는데 들보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부러져 거기에 눌려 죽었다.

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쳐서 사당으로 달려오더니, 간원이 차린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리고서 제사지냈다. 그러나 세 번째 잔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 집으로 가자마자 죽었다.

옛 사람의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는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했다. 또 도적들이 “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고 하면서 훔쳐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활에다 화살을 메긴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방을 향해 비 오듯 화살을 쏘았다. 7~8명을 맞춰 죽이자 나머지 도적의 무리가 달아났다. 그들이 며칠 뒤 다시 왔을 때에는 30여 척이나 되는 큰 구렁이가 눈빛을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사당 곁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였다.

▲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지산동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산책, 등산로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지산동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는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시가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산책, 등산로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다.
건안 4년 기묘년(199)에 처음 사당을 세운 다음부터 지금 왕이 즉위한 지 31년 되는 대강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78년이 지났다. 그러나 쌓아올린 흙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때 심은 나무도 말라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 벌려놓은 수많은 옥 조각들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

순화 2년(991)에 김해부 양전사였던 조문선이 “수로왕 묘에 소속된 전답의 결수가 많습니다. 마땅히 15결로 해서 옛 관례에 따르고, 그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들에 나눠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조사 보고했다.

그때 조정에서 “하늘에서 내린 알이 성군으로 변하여 왕위에 올라 158세나 되었으니 저 삼황 이후로는 어깨를 겨룰 자가 드물다. 왕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선대로부터 사당에 전답을 소속게 했는데 지금 줄인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라며 왕의 뜻을 전했다.

양전사가 거듭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맞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 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 부역하는 호정들에게 지급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양전사의 꿈에 7~8명의 귀신이 밧줄과 칼을 들고 나타나 “네가 큰 죄를 지었으니 죽여야겠다”며 꾸짖었다.

▲ 대가야왕릉전시관 앞에 가야시대 장군동상이 우뚝 서있다.
▲ 대가야왕릉전시관 앞에 가야시대 장군동상이 우뚝 서있다.
양전사가 형벌을 받는 줄 알고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그리고는 이내 병이 들어 밤중에 달아나다가 병이 심해져서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

가야는 수로왕이 건설해 아들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을 거쳐 10대 구형왕 42년 임오년(562)에 신라에 항복하며 나라가 없어졌다.

▲ 지산동 정상 부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1호, 2호, 3호, 4호분 등으로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산 정상 부위에 위치하고 있는 4호분.
▲ 지산동 정상 부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1호, 2호, 3호, 4호분 등으로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산 정상 부위에 위치하고 있는 4호분.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야는 멸망하지 않았다

신라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18세부터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하게 되면서 정복군주로 탈바꿈했다. 정복군주로 나설 때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던 장군 이사부와 손잡고 가야를 합병하고 백제, 고구려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진흥왕은 친정체제에 접어들어서도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에 휘둘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서히 주변 세력들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가장 깊숙이 손을 잡은 세력이 가야국의 왕족들이다. 가야 구형왕의 맏아들 노리부는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며 특히 무술을 잘하는 용맹스런 장수였다.

진흥왕은 항상 노리부를 자기 옆에 두고, 국정을 살피는 일이나 정복전쟁에 나설 때도 노리부와 함께 했다. 병부령에서부터 가야의 귀족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기존 귀족층들을 견제하게 했다.

▲ 국보 제33호로 지정된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 22년, 561년에 세운 것으로 확인되는 ‘신사년’이라는 명문이 있다. 신라 6부의 명칭, 중앙 및 지방의 주요 관직 명칭, 지방 유력자의 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적 실상을 밝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국보 제33호로 지정된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 22년, 561년에 세운 것으로 확인되는 ‘신사년’이라는 명문이 있다. 신라 6부의 명칭, 중앙 및 지방의 주요 관직 명칭, 지방 유력자의 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적 실상을 밝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미실이 진흥왕의 힘을 등에 업고, 뒤로는 거칠부와 손잡고 진지왕을 옹립했다. 이때 노리부는 한발짝 뒤로 물러나야 했다. 진지왕이 여색에 빠지고, 거칠부가 상대등에 올라 실권을 휘두르자 미실은 노리부를 불러들여 다시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옹립했다.

노리부가 직접 실력행사를 통해 거칠부를 제거하고, 진평왕을 옹립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해 상대등에 올랐다. 노리부가 진평왕을 옹립한 것은 미실의 영향도 있었지만 진흥왕이 일찍부터 가야 왕족들을 가까이 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보살핌에 대한 은혜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 진흥왕 척경비 앞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이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진흥왕 척경비 앞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이 있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가야는 멸망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가야의 중심인물들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를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 발전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도 노리부의 손녀 사위이자 가야 출신인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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