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6명의 가야왕, 김수로왕 가야세우고 158세까지 다스려

▲ 분산성은 김해시에 위치하고 있는 가야시대에 처음 지어진 성으로 전해진다. 사적 제6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999년에 복원하면서 일부 구간은 옛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산 정상에 위치해 김해 시가지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된다.
▲ 분산성은 김해시에 위치하고 있는 가야시대에 처음 지어진 성으로 전해진다. 사적 제6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999년에 복원하면서 일부 구간은 옛모습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 산 정상에 위치해 김해 시가지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된다.
가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유사에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이 사람으로 변해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김수로왕이 최초로 가야의 시조가 되었다. 금관가야가 초기에는 6가야국의 맹주였다. 신라의 공격을 받아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야의 맹주로 떠올랐다.

가야는 520여 년간 지속되면서 상당히 세련된 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금관가야 유적지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화려한 목걸이, 팔찌, 청동거울과 철제 제품들, 섬세하게 다듬은 토기류가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가야가 신라에 정복되었지만 왕족과 백성들이 신라의 귀족으로, 정부 주요 대신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가야의 후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가야국가에 대해 제법 길게 소개하고 있지만 금관가야와 대가야 두 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 분산성 정상에 자리한 봉수대, 김해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남해고속도로 서낙동강과 부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 분산성 정상에 자리한 봉수대, 김해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남해고속도로 서낙동강과 부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가

천지가 처음 열린 후로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또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있다는 것이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무릇 1만 호에 7만5천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산과 들에 살면서 스스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농사를 지었다.

마침내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의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2~300명의 무리가 여기에 모였더니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누가 없는가”라고 했다.

9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고”라고 했다. “구지입니다”라 대답하자 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에게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한 까닭으로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고 했다.

▲ 분산성은 가야시대 축조되었지만 조선 초기에 다시 축조하고,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고종 때 현재의 성벽으로 고쳤다. 성의 동쪽 성벽으로 남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외벽은 낭떠러지로 이어져 접근하기가 어렵다.
▲ 분산성은 가야시대 축조되었지만 조선 초기에 다시 축조하고,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고종 때 현재의 성벽으로 고쳤다. 성의 동쪽 성벽으로 남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다. 외벽은 낭떠러지로 이어져 접근하기가 어렵다.
9간들이 그 말대로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보랏빛 줄만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아 있었다. 줄 끝을 찾으니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으로 된 합이 보여, 그것을 열어 보자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다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아두고 무리는 각자 흩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여러 사람이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이 변하여 용모가 매우 뛰어난 어린아이로 되었다.

이들이 나날이 자라 10여 주야를 지나니 키가 9자로 은나라 천을과 같은 얼굴이 용 같아 한나라의 고조라 할 수 있었다.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인 것은 도당의 요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의 순임금과 같았다.

▲ 분산성의 경치는 사계절 아름답다. 특히 서쪽 성벽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전국에서도 이름난 곳으로 알려져 작품으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 분산성의 경치는 사계절 아름답다. 특히 서쪽 성벽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전국에서도 이름난 곳으로 알려져 작품으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 세상에 나타났다 하여 이름을 수로 또는 수릉(수릉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시호이다.) 이라고도 했다.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도 하였으니 곧 여섯가야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가야의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질박과 검소를 바랄 뿐으로 집에 이은 이엉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된 계단도 3자였다.

▲ 가야를 세운 시조는 김수로왕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사람의 설화로 전해진다. 삼국유사는 김수로왕의 탄생과 결혼, 석탈해와 겨루는 술법 등을 소개하며 158세에 임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릉은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어 있고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해 있다. 수로왕릉 사적지 입구와 홍살문.
▲ 가야를 세운 시조는 김수로왕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사람의 설화로 전해진다. 삼국유사는 김수로왕의 탄생과 결혼, 석탈해와 겨루는 술법 등을 소개하며 158세에 임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릉은 사적 제73호로 지정되어 있고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해 있다. 수로왕릉 사적지 입구와 홍살문.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이옵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서 함께 하늘의 상제를 뵈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시조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런 이는 오직 그 분일까 한다. 그런데 그가 나라를 새로 다스리고 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반드시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귀에 쟁쟁할 뿐이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 가서 찾기도 하였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야 보잘것없는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라 했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아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는 청이 있었으나 기어코 듣지 않았소이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요”라고 했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보냈다.

▲ 김수로왕릉 유적지 앞에 남아 있는 하마비.
▲ 김수로왕릉 유적지 앞에 남아 있는 하마비.
이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거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공로는 마치 도산이 하나라를 돕고 당원이 교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서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 6년은 기사년(189)인데 3월1일에 왕후가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7세.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왕은 늘 베개 위에서 홀아비의 슬픔을 노래하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10년이 지난 헌제 건안 4년은 기묘년(199)인데 3월23일에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8세. 나라 안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비통해 했는데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했다. 곧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00보 되는 빈궁을 세웠다. 여기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 했다.

▲ 분산성으로 진입하는 둘레길을 따라 김수로왕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그려두고 있다.
▲ 분산성으로 진입하는 둘레길을 따라 김수로왕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그려두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금관가야

김수로왕이 가야국을 건국하고 모두 6개 이웃과 연맹체제를 맺어 철기를 활용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야는 풍부한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치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류도 넓혀 한때는 신라, 백제, 고구려와 함께 4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야는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어렵게 나라를 유지해야 했다.

김수로왕은 서역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침략해온 석탈해군단을 맞아 전쟁을 치렀다. 석탈해는 거대한 체구에다 큰 환두대도를 수수깡 다루듯 자유롭게 휘두르며 뛰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수로왕의 실력과 전술전략에 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 김수로왕릉. 대형 원형토분으로 왕릉에 특별한 시설물은 없다. 조선시대 영남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수축했고, 인조가 ‘가야수로왕릉’ 능비를 세웠다. 안향각, 신도비각, 석양, 가락루, 연신루, 회로당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왕릉 앞에는 4구의 석상과 조선시대 세운 가야수로왕릉비가 있다.
▲ 김수로왕릉. 대형 원형토분으로 왕릉에 특별한 시설물은 없다. 조선시대 영남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수축했고, 인조가 ‘가야수로왕릉’ 능비를 세웠다. 안향각, 신도비각, 석양, 가락루, 연신루, 회로당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왕릉 앞에는 4구의 석상과 조선시대 세운 가야수로왕릉비가 있다.
법흥왕 시대에 신라는 가야를 공격해 상당 부분 토지를 빼앗고, 신라에 복속시켰다. 이때 법흥왕은 가야왕을 그대로 영토를 다스리도록 했다. 당시 가야 후손들이 신라의 중심귀족으로 성장하고, 대신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전하는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장군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진흥왕이 금관가야를 비롯 가야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신라에 합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신라의 중신으로 등용해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운영했다.

진흥왕의 가야귀족 우대정책은 결국 진흥왕의 적자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진흥왕의 후의를 입은 가야의 귀족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흥왕의 장자 동륜의 적자 진평왕을 옹립했다.

▲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수로왕비릉은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형의 원형토분이며 능 앞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능 바로 앞에 조선시대 인조가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라고 2행으로 글을 새긴 능비가 있다.
▲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수로왕비릉은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형의 원형토분이며 능 앞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능 바로 앞에 조선시대 인조가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이라고 2행으로 글을 새긴 능비가 있다.
가야라는 나라 이름은 사라졌지만 가야인들은 신라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김해김씨,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어 대대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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