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깨어난 6명의 가야왕, 김수로왕 가야세우고 158세까지 다스려
가야는 520여 년간 지속되면서 상당히 세련된 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금관가야 유적지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화려한 목걸이, 팔찌, 청동거울과 철제 제품들, 섬세하게 다듬은 토기류가 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가야가 신라에 정복되었지만 왕족과 백성들이 신라의 귀족으로, 정부 주요 대신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른 신라의 김유신 장군도 가야의 후손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는 가야국가에 대해 제법 길게 소개하고 있지만 금관가야와 대가야 두 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천지가 처음 열린 후로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란 없었다. 또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있다는 것이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다. 이들 추장이 백성을 통솔했으니 무릇 1만 호에 7만5천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산과 들에 살면서 스스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농사를 지었다.
마침내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의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2~300명의 무리가 여기에 모였더니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여기에 누가 없는가”라고 했다.
9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있습니다” 하니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고”라고 했다. “구지입니다”라 대답하자 또 말하기를 “하느님이 나에게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한 까닭으로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다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을 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아두고 무리는 각자 흩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여러 사람이 다시 모여 합을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이 변하여 용모가 매우 뛰어난 어린아이로 되었다.
이들이 나날이 자라 10여 주야를 지나니 키가 9자로 은나라 천을과 같은 얼굴이 용 같아 한나라의 고조라 할 수 있었다.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인 것은 도당의 요임금과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의 순임금과 같았다.
가야의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질박과 검소를 바랄 뿐으로 집에 이은 이엉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된 계단도 3자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짐은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아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는 청이 있었으나 기어코 듣지 않았소이다.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참으로 다행이요”라고 했다. 드디어 혼인하여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보냈다.
그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서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영제 중평 6년은 기사년(189)인데 3월1일에 왕후가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7세.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왕은 늘 베개 위에서 홀아비의 슬픔을 노래하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10년이 지난 헌제 건안 4년은 기묘년(199)인데 3월23일에 돌아가셨다. 누린 나이는 158세. 나라 안 사람들이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비통해 했는데 왕후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했다. 곧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가 한길, 둘레가 300보 되는 빈궁을 세웠다. 여기에 장사지내고 수릉왕묘라 했다.
김수로왕이 가야국을 건국하고 모두 6개 이웃과 연맹체제를 맺어 철기를 활용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가야는 풍부한 농산물과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치기도 했다. 일본과의 교류도 넓혀 한때는 신라, 백제, 고구려와 함께 4국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야는 지리적으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위치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어렵게 나라를 유지해야 했다.
김수로왕은 서역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침략해온 석탈해군단을 맞아 전쟁을 치렀다. 석탈해는 거대한 체구에다 큰 환두대도를 수수깡 다루듯 자유롭게 휘두르며 뛰어난 무술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수로왕의 실력과 전술전략에 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전하는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장군으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진흥왕이 금관가야를 비롯 가야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신라에 합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신라의 중신으로 등용해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운영했다.
진흥왕의 가야귀족 우대정책은 결국 진흥왕의 적자승계 원칙을 고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진흥왕의 후의를 입은 가야의 귀족들이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흥왕의 장자 동륜의 적자 진평왕을 옹립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