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익숙해지며

로버트 프로스트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빗속을 홀로 거닐다 비를 맞고 되돌아왔다/ 거리 끝 불빛 없는 곳까지 거닐다 왔다// 쓸쓸한 느낌이 드는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저녁 순시를 하는 경관이 곁을 스쳐 지나쳐도/ 얼굴을 숙이고 모르는 체 했다.// 잠시 멈추어 서서 발소리를 죽이고/ 멀리서부터 들려와 다른 길거리를 통해/ 집들을 건너서 그 어떤 소리가 들렸으나// 그것은 나를 부르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이별을 알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멀리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높다란 곳에/ 빛나는 큰 시계가 하늘에 걸려 있어// 지금 시대가 나쁘지도 또한 좋지도 않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밤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세계의 명시』 (국일미디어,1985)

................................................................................................................

밤은 어둠이고 단절이다. 어두워서 두렵고 단절되어 고독하다. 두려움은 혼자 내공을 쌓아올려야 이겨낼 수 있다. 고독은 사색과 수양을 통해 내면의 성을 다질 기회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밤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활짝 열어주는 자궁인 셈이다. 시인은 수련과 단련을 쌓은 끝에 정신세계가 열리게 된 사연을 고백하고 있다. 비는 인간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일종의 장애물이다. 비가 내려도 좋다. 어떤 방해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 버릴 참이다. 빗속을 홀로 거닐며 오히려 더불어 즐긴다. 비는 장애물이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까지 발길을 돌린다. 문명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관심을 가진다. 비가 와서 인적이 드문 밤거리에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맑은 날엔 사람이 끊이지 않던 거리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거리마저 오히려 편안하다. 쓸쓸함도 외로움도 보듬는 여유가 동양화처럼 해말갛다. 야간 순찰을 도는 경관은 세상을 살아가는 시각적 상징이다. 빗속을 거니는 시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얼굴을 숙이고 부드럽게 지나가는 센스가 자연스럽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환영하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 가라는 인사도 아니다. 사색을 깨우는 장애로 살짝 성가실 뿐. 집들을 가로질러 정적을 깨는 소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청각적 상징이다. 걸음을 잠시 멈추어 비켜서는 노련함 속에 내공의 깊이가 얼핏 드러난다. 훼방꾼에 초연한 시인의 마음을 은유한다. 시각적 방해와 청각적 장애를 가볍게 받아넘기는 순발력은 여백의 공간이고 배려의 시간이기도 하다.

오직 시인이 열어놓은 공간은 자연이다. 숲과 하늘과 바람 그리고 별들이다. 시인은 숲 속으로 난 길을 혼자 걷는다. 나무와 풀이 숨을 죽이고 한줄기 바람이 바쁜 마음을 드러내듯 등을 떠민다. 숲 속엔 두 갈래 길이 있다. 두 갈래 길에서 고심하고 또 망설인다. 풀이 더 많이 난, 그래서 사람이 덜 다닐 것 같은 길을 선택한다. 두 갈래 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빼 뒤돌아보는 시인의 마음이 정겹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아름다운 시를 잉태할 때까지 마음 속 깊이 담아둘 일이다. 어둠이 사위를 감추어도 하늘의 별들마저 가릴 순 없다. 하늘엔 별들이 향연을 벌인다. 별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높다란 하늘에 걸려있는 거대한 시계다. 오늘도 변함이 없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시간을 알려줄 양 미소 짓는다. 시인은 어느새 밤에도 익숙해진다. 자연과 인생을 관조한 시를 감상하노라면 ‘자연시인’이라는 닉네임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 일상적이고 평이한 언어를 구사하며 마음을 뺏는 시인은 진정한 미국적인 시인이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