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모든 나무 덤불과 돌이 외롭다/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나의 삶이 아직 환했을 때/ 내게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다/ 이제, 안개가 내려/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을, 떼어 놓을 수 없게 나직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그를 갈라놓는/ 어둠을 모르는 자/ 정녕 그 누구도 현명치 않다/ 기이하여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 삶은 외로이 있는 것/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누구든 혼자이다

『헤르만헤세대표시선』(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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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엔 가시거리가 짧다. 적외선 고글을 쓴다면 사정은 다르겠지만. 안개는 중의적이다. 안개는 연결을 끊는 장애물임과 동시에 어둠의 학습장이다. 장애물로 파악하고 극복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여 적응하는 자세가 공존한다. 전등은 전자의 결과물이고 인문학적 사유는 후자의 인용이다. 어느 게 더 나은지 단정하긴 곤란하다. 안개 속을 거닐면 묘한 세계와 만난다. 나무와 돌이 홀로 선다. 하늘도 뿌옇게 차단된다. 삼라만상이 따로 논다. 본질과 만난다. 모두가 연결된 채 돌아가는 ‘초연결사회’에 안개는 드믄 단절신호다. 스마트폰이 잠시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무료하다. 남과 단절된 채 돌아가는 세상이 불안하다. 세상의 동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거부한다. 만물을 갈라놓는 안개는 현대인에게 고독과 불안을 준다. 하지만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홀로 존재한다. 안개는 존재와 존재를 분리한다. 존재의 참모습을 일깨워준다.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을 성찰하는 시간이다. 조용히 침잠하여 긴 호흡으로 깊이 있게 삶의 참모습을 돌아본다.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소중한 기회다. 현대인은 ‘지금’을 숭상한다. 삶이 깃털처럼 가볍다. 안개는 인간에게 소중한 경험의 장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에게 안개 속을 걷는 체험은 값지다. 경박하고 야트막한 풍조가 유행이기에 안개는 더욱 소중하다. 찰나를 즐기는 삶이 대세인 시대에 안개는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다.

살다보면 환한 날이 있다. 잘 풀릴 때다. 돈 벌 기회를 귀띔하고 돈도 빌려준다. 잘나가는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응원한다. 주위엔 온통 우군이다. 허나 어둠은 항상 대기 중이다. 어둠은 어쩔 수 없이 조용히 사람을 떼어놓는다.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빛이 필요한 것 만큼이나 어둠도 필연적이다. 햇빛 아래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할 일이 따로 있다. 어둠 속에서 내공을 쌓아야만 밝은 날 힘차게 움직이는 법이다. 세상과 단절될 때, 내실을 다지고 에너지를 충전시켜둬야 한다. 일이 엉키고 주변에서 친구가 떠날 때, 삿된 사람을 걸러내고 참다운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 친구가 떠난 상황에 덧없음을 슬퍼하면서 실의에 빠지는 것보다 발가벗은 자신의 참모습을 확인하는 기회로 활용하여야 한다. 남이 어려울 때 곁에서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된다면 어둠은 교훈을 주는 빛이다. 어둠은 안개와 별개다. 어둠은 다 가려버리지만 안개는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격리한다. 어둠은 기도를 낳지만 안개는 ‘홀로서기’를 가르쳐준다. 어둠은 종교를 낳는 토양이지만 안개는 지혜를 주는 도량이다. 안개는 어둠과 친해지는 연습이기도 하다. 인간은 혼자다. 떠날 땐 혼자 간다. 마지막 한 걸음도 혼자 걷는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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