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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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賦)’란 ‘시경’에 터 잡은 한문학 장르의 하나로서 송나라의 소순, 소식, 소철 등 소씨 3부자가 ‘당송 8대가’에 꼽히며 ‘부’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 중 소동파(소식)의 ‘적벽부’는 일세를 풍미한 명문이다. 시제 ‘서풍부’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란 구절로 유명한 ‘퍼시 B. 셸리’의 시 ‘Ode to the west wind’를 ‘서풍부’로 번역한 데 따른 영향이 큰 듯하다. 시인으로서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기시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서정주의 ‘서풍부’도 같은 맥락이다. 현대의 ‘부’는 풍유를 통해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서정적으로 읊은 시를 칭한다.

「서풍부」는 외견상 서풍에 대한 감회를 서정적으로 노래한 시로 보이긴 하지만 그건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서풍을 하늬바람으로 해석한다면 복사꽃을 설명하기 곤란하다. 하늬바람은 늦은 여름이 제철이고 복사꽃은 4월쯤 피기 때문이다. ‘부’도 원래적 의미의 ‘부’가 아니다. 말하자면 시제 ‘서풍부’는 아무 의미도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더 이상 따지지도 말고 이유도 달지 말자. 그냥 ‘서풍부’면 족하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사족 자체가 무의미하다. 꽃인 듯 꽃이 아니다. 눈물인 듯 눈물이 아니다. 이야기인 듯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나타나도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아름다운 꽃, 슬픔의 눈물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누가 어떤 얼굴을 해도 다 부질없다. 꽃이든 눈물이든, 그게 무엇이든지 아무 것도 아니란 점에서 모두 같다.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슬픔의 눈물이든 기쁨의 환호든, 그런 얼굴이든 저런 얼굴이든, 모두 다 무의미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물상과 희로애락이 다 공허하다. 의미 있는 것들은 어쩌면 다 무의미하다. 세월이 흐르면 삼라만상도 스러진다. 시간이 가면 사단칠정도 무상하다. 무엇 하나 뚜렷이 잡히는 건 하나도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환한 햇빛이 손을 흔들고 지나가듯이 시간은 햇빛과 함께 지나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모르더라도 햇빛은 시간을 싣고 미래를 향해 운항한다. 온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지만,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없다. 복사꽃이 아름다운 듯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떨어지고 만다. 햇빛이 시간을 태우고 가버리면 아등바등 잡고 있었던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생명이 가버리면 부귀영화인들 무슨 소용일까. 제행무상이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생명과 희망으로 들뜨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 사랑과 이별로 괴로워한다. 이별이 슬픈 듯 보이고 마음이 아프지만 지나고 보면 공허하다. 이런 저런 곡절과 사연으로 번뇌를 떨치지 못할 듯 괴로워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만이다. 누가 슬픈 얼굴로 눈물짓든지, 누가 기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리든지, 모두 다 세월 속에 묻힐 텐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제법무아다. 「서풍부」는 탁월한 리듬감과 탐미적 감각으로 추상과 관념을 노래한, 중독성이 강한 시다. 오철환(문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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