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에 이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시인이 된다. 어느 결에 봄이 내 앞에 와있음을 즐길 겨를도 없이 바삐 돌아가는 일상 잠시 접어두고 살며시 시인의 꿈을 꺼내본다. 그리고 한 편의 시를 읽는다.



▲ 정호승 시집, 당신을 찾아서
▲ 정호승 시집, 당신을 찾아서
▲당신을 찾아서/정호성 지음/창비/184면/9천 원

인생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따뜻한 시편들로 사랑 받아온 우리 시대 대표적인 서정시인 정호승의 신작 시집 ‘당신을 찾아서’가 출간되었다.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눈물의 고해성사를 통해 인간이라는 불씨, 인간이라는 새싹을 살려내는 뭉클한 감동이 서린 순정한 서정 세계를 선보인다. 진솔하고 투명한 언어에 깃든 불교적 직관과 기독교적 묵상과 도교적 달관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정결한 시편들이 가슴을 촉촉이 적시며 잔잔하게 울린다.

모두 125편의 시를 각부에 25편씩 5부로 나누어 실었으며, 이 중 100여 편이 미발표 신작시이다.

정호승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생에 대한 경외심이 우러난다. 그의 시를 읽으면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된다.

시인은 “내 시의 화두는 고통”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살아갈수록 상처는 별빛처럼 빛나는 것이고, 그 상처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은 시가 삶을 성찰하는 거름이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1973년 스물네 살에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이른 살, 종심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시의 외길을 걸어왔다. 질곡의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시인으로서의 삶에 늘 감사해하며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견결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살아온 천생의 시인이다.

그동안의 시를 통해 “어느덧 죽음을 앞둔 늙은 어린이가 되어 인생 칠십의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는 시인은 이제 다시 시를 쓸 수 있을지 못내 두렵다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더러운 풍경과 이 세계의 추악한 얼굴이 사라지지 않는 한 화해하는 숯의 심장에 용서의 불씨를 품은 참숯”과 같은 순결한 시심은 쉽사리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는 인간의 심장을 검게 물들이는 어둠을 밝히는 한 점 불빛이자 삶을 풍요롭게 하는 영혼의 양식이다.



▲ 최정 시집, 푸른 돌밭
▲ 최정 시집, 푸른 돌밭
▲푸른 돌밭/ 최정 지음/ 도서출판 한티재/140쪽/ 9천 원

‘1인 여성 농부’ 최정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시인은 도시 생활을 접고 2013년부터 경북 청송의 작은 골짜기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있다. 밭 한 귀퉁이에 여섯 평짜리 농막을 지어 놓고, 1천여 평의 밭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생활의 전부라는 시인.

“청송 작은 골짝 끝자락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은 큰 행운 이었다”고 고백하는 최정 시인은 “작은 골짝의 품에 안겨 받은 위로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한다. 농사일을 하며 몸이 느끼는 대로 생활하는 단순한 삶의 일부가 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들의 주인은 흙과 풀들”이라고 털어놓는다.

노태맹 시인은 시집 발문에서 “노동하고, 기도하고, 밤늦게 시를 쓰는 수도자의 모습을 그이의 시에서 나는 보았다. 나는 그것을 시 앞에서의 침묵, 시를 위한 침묵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때 침묵이란 단순한 말없음, 묵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로서의 침묵이고, 노동과 행동을 전제로 한 침묵”이라고 소개한다.

최정 시인은 노동하는 수도자처럼 노동이라는 침묵의 사유를 통해 자연의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을 시로 기록함으로써 대부분의 우리가 가는 반대 방향에서 사회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의 노동이 자연의 노동 앞에 겸허해지는 최고의 순간을 감히 받아 적은 시집 ‘푸른 돌밭’에는 고된 노동 속에서 삶과 시를 함께 일구어온 시인의 독한 마음과 높고 따뜻한 마음이 함께 드러난다.

감자밭의 독사를 ‘내장이 터지고 머리가 납작해지도록 내리치고 또 내리치던’ 시인은 손톱만큼 자란 양배추 싹을 쏙 뽑아 먹는 새끼 고라니를 너그러이 눈감아 준다. 감자 싹이 간신히 흙을 밀어 올리며 들려주는 무거운 말씀을 감히 받아 적는 시인은 자신의 마음 밭도 아름답게 일구기 위해 애를 쓴다.



▲ 신현림, 7초간의 포옹
▲ 신현림, 7초간의 포옹
▲7초간의 포옹/신현림 지음/민음사/168쪽/ 1만 원

시인 신현림의 일곱 번째 시집 ‘7초간의 포옹’이 출간되었다. ‘포옹’을 그 중심 화두로 삼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또 한 번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7초간의 포옹’의 화자들은 어느 곳에서나 슬픔을 감지한다. 그들은 슬픔을 찾아내는 레이더를 가진 것처럼 영화를 보면서도, 침대에 누워서도,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도, 도무지 슬픔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은 공간에서도 어김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눈물 흘리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로의 방법은 무엇일까. 따뜻한 말을 건네거나 가만히 안아 주는 것 이전에, 이 시집의 화자들은 상대보다 더 큰 소리로 울어 버린다. 내 몸도 이미 폐가이며 나도 너처럼 몹시 춥다고 숨김없이 이야기한다. 그렇게 했을 때 나의 슬픔 역시 당신에게 발견될 수 있음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서로의 깊은 곳을 알아본 관계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연대와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와 당신을 모두 엉엉 울게 했던 슬픔이 한 가지 표정을 가졌던 것과 달리 희망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희망은 너의 솔직한 마음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됐다는 기쁨이기도 하고, 쓰러질 것처럼 힘들 때마다 나를 받쳐 준 엄마의 말이기도 하며, 끝끝내 살아 보자는 열정이기도 하다.

희망의 여러 얼굴들은 보다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바로 ‘포옹’이라는 작지만 강한 움직임. 잠깐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세상을 ‘비 그친 후의 태양처럼 향기롭게 뒤바꾸는 포옹의 힘’을 시인은 굳게 믿고 있다.



▲ 이정환 설미인곡
▲ 이정환 설미인곡
▲설미인곡/이정환 지음/고요아침/159쪽/1만 원

시조시인 이정환의 가사시집 설미인곡이 출간 되었다. 작가는 가사시를 삶의 한 대응방식으로서 묘한 매력을 지닌 문학의 한 갈래라고 설명한다. 4음보 가락을 타면서도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어서 생각을 활달하게 펼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설미인곡은 몇 년 전 한 문학세미나가 계기가 되어 ‘오늘의 가사문학’에 연재한 가시시를 시집으로 출간한 것이다. 1부는 사랑의 불완전함을 꿰뚫고 불멸을 희구하는 존재론적 시편 ‘설미인곡’ 연작을, 2부는 삶의 고뇌와 애환을 체화한 서정적인 세계를, 3부는 내밀한 신앙 고백과 성서 속의 인물열전이다.

가사는 시조와 비슷한 때 태동하여 조선시대를 지나 전해온 우리의 전통 갈래다. 4음 4보격을 표준 율격으로 정할 뿐 행과 연에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형식상으로 운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자유로운 문장의 연속체라고 할 수 있다. 설미인곡은 시조의 단아한 정형에서 벗어나 가사의 확장적 가락을 통해 특유의 개방성과 서술형을 구축해 간다.

작가는 “설미인곡의 큰 흐름은 결국 사랑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자연을 사랑하는 일, 창조주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눈물겹도록 느꺼운 것이다. 이 느꺼움은 곧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힘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이정환의 가사시집에는 사물과 언어를 새롭게 배열하여 그것을 새로운 형식으로 표상하려는 역동적 의지가 가득하다. 그의 이번 시집은 시인으로서의 도정에 일종의 장르적 확장을 시도한 것으로서, ‘시조’라는 산맥을 넘어 ‘가사’라는 바다로 건너가는 중진 시인의 가파른 모험을 담고 있다”고 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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