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대한 단상

이송희

털썩, 주저앉고서야 처음 너를 보았어/ 차갑게 누워 버린 절망의 담벼락을/ 한없이 꺼져만 가는/ 옥탑방 바닥을

팔 베고 누우면/ 천장이 바닥이 되고/ 우르르 무너진 하늘 별빛도 숨었는가/ 겨울의 파편 속에서 밤은 더 깊어진다

겹겹이 쌓인 한숨을 하나씩 거둬낸다/ 내 무릎을 받아주던 너를 끌어안으면/ 바닥은 부스스 일어나/ 길이 되기 시작했다

-『나래시조』(2018,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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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는 광주 출생으로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과 평론집 『눈물로 읽는 사서함』『아달린의 방』등이 있다.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는 시인이다.

「바닥에 대한 단상」은 새로운 시각이다. 바닥은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기억 중의 하나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다, 바닥에 꿇어앉으시오, 와 같은 아픈 기억들이 있다. 평소에는 바닥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털썩, 주저앉고서야 처음 바닥을 내려다보게 된다. 그것은 비정하게도 차갑게 누워 버린 절망의 담벼락이다. 굳건하게 서 있어야할 담이 누워버린 것은 좌절이다. 앞이 캄캄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막다른 벼랑 앞에 선 것을 절감하고 좋지 않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때 힘들더라도 그 자리에서 곧장 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힘을 평소 길러두어야 할 것이다.

화자는 이어서 한없이 꺼져만 가는 옥탑방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정황을 말한다. 팔 베고 누우면 천장이 바닥이 되고 우르르 무너진 하늘은 별빛도 숨었을 것 같은데 겨울의 파편 속에서 밤은 더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겹겹이 쌓인 한숨을 하나씩 거둬내고 내 무릎을 받아주던 바닥을 끌어안으면 바닥은 부스스 일어나 길이 되기 시작했다는 결구는 강렬한 의미를 가진다. 시에서 마무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바닥이 길이 된다는 존재론적 해석은 탁월하다. 특히 부스스 일어나, 라는 표현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닥에 대한 단상」은 우리가 때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분명하게 일깨워주는 시편이다.

그는 또「유리잔을 마주하다」라는 시조에서 당신은 늘 불안한 당신을 감싼다, 라고 조심스럽게 어떤 이야기를 꺼낸다. 잘 지내고 있나요, 라고 물었을 때는 안부가 출렁인 순간이다. 그때 어느새 실금이 가는데, 믿음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고요가 깨진 자리에 쏟아진 목소리로 복받친 말들이 아주 잠시 반짝였다, 라는 대목은 감각적이고 둘 사이의 간극, 충돌과 같은 낌새가 여실하다. 오래된 기억들이 툭, 부서져 버린 시간이라는 종장이 그 점을 보다 명확하게 환기한다. 이어서 적막한 이 순간을 참을 수 없었을까, 하고 반문하면서 내지른 소리들이 손끝에 박히는 것을 아프게 살핀다. 동시에 노래가 그치는 순간 음악까지 멎어버린다. 관계 형성 즉 관계 맺기가 곧 인생사인데 끝내 서로의 갭을 재확인할 뿐 사이가 버성겨지는 것을 피하지 못할 때를「유리잔을 마주하다」는 냉철하게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바닥에 대한 단상」과 함께 묶어서 읽으면 좋겠다.

시조문단을 윤택케 하는 일에 일익을 감당하고 있는 이송희의 시편은 올곧은 길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아픈 무릎을 받아주던 바닥을 꼭 끌어안아 주자 그때 바닥은 부스스 일어나 새로운 길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그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희망을 줄기차게 노래할 일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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